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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l 05. 2021

미우라 켄타로

미완의 완벽주의자

내가 원래 베르세르크의 이야기를 한 것은 미우라 켄타로라는 작가에 대해 내가 느낀 바를 이야기하려 함이었는데 한참 전에 읽어서 디테일에 세밀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품의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만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솔직히 나는 미우라 켄타로라는 작가 자체도 상세히 알지 못한다. 단지 가끔씩 글이나 그 밖의 작품들을 감상할 때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내적 고통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고 이 작가의 경우도 내게는 그런 케이스라고 하겠다. 작품이나 삶의 태도에서 완벽주의들이 묻어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대게 내적 고통을 가지고 있고 자기 방어적인 사람인 경우가 많다. 상대의 지적에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그런 지적을 피하기 위해 더욱 꼼꼼해지는 것인데 그것이 지나칠 경우 삶의 밸런스가 무너지고 그로 인해 여러 병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완벽주의자의 가장 큰 두 가지 병폐는 타협하지 못하는 것과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완벽주의가 남에게는 어떻게 비추어질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이 두 가지로 정말 큰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 일단 시작한 것은 쉽게 멈추지 못하고, 정말 해야 하는 것은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이 기질은 삶과 판단의 모든 밸런스를 망가뜨려 버린다. 완벽이란 좋은 말처럼 보이지만 유한한 자원을 가진 우리가 무언가에 완벽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철저하게 무관심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 완벽하다고 느끼는 어떤 것에 자극적 쾌감을 느끼고 자신의 스킬은 자꾸 늘어가지만 문제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활 그리고 주변의 친한 사람들이 망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주의에 빠져있는 누군가를 우리는 지나치게 부추기면 안 된다. 미우라 켄타로 정도가 되었으면 내가 보기에는 상당한 중증환자이다. 주변에서 그의 건강과 삶의 밸런스가 무너진 것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의 독촉과 완벽주의에 대한 우상화 그리고 멈출 수 없는 만화산업의 특성으로 그는 위대한 만화작가의 반열에는 올랐으나 삶 자체는 너무 초라했다. 그의 삶을 위대하다고 말할 누군가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아니다. 왜냐하면 저 삶이 너무 고통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다.


삶의 밸런스가 망가지면 사람들은 그것을 무마할 무엇을 반드시 찾게 된다. 그리고 익숙한 것을 찾고 그것에만 매달리면서 다른 모든 생각을 잊게 된다. 이것이 일종의 ‘마비’다 폭넓고 균형적인 생각이 어려운 것은 다른 모든 중독 증세와 똑같다. 술과 약에 찌든 사람이 그 함정에서 혼자 빠져나올 수 있는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자기 일에 중독된 사람도 그것에서 혼자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일에 중독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불안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다 자신 안에 깊숙이 내재된 불안의 근원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 그것을 치유할 생각을 하지 않고 주위의 평가와 물질적 보상으로 자신의 진정한 결핍을 무마하면서 계속 진정한 자기 대화는 미루고 도망치는 것이 이런 완벽주의의 다른 면이다.


‘너 따위가 이런 위대한 작가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고 한다면 인정하겠다. 지금 내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대신하던 헛소리는 마저 하겠다.


그가 살면서 자조적으로 하는 말은 너무 슬프다. 그것이 주위에서 자기를 멈추어 주기를 바라는 구조신호인지도 모르는데, 그의 입에서 이제 와서 다른 것을 할 수도 없고 여기에 나의 모든 것을 불사르겠다고 하는 말에 주변이 모두 동조하고 따라간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느껴진다. 싸우는 도중에 주위에서 말리면 ‘야! 말리지 마.’라고 소리치면서도 내심 말려주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듯 그의 완벽주의는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졌고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마음의 질병으로 판단하고 진지하게 치료를 받도록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가 그리는 그리피스와 가츠는 그의 그런 내적 모순이 그대로 형상화된 느낌이 든다.


그리피스는 화려한 꿈을 좇는 완벽주의자다. 하지만 그의 꿈은 진정한 내용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삶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꿈이라는 허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가치들을 제물로 바쳤고 이후 다시 부활해 같은 꿈을 이루기 위해 더 강한 동료들을 모아서 꿈으로 돌진한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룬다고 그리피스가 만족할 수 있을까? 미우라 켄타로가 이 미완의 작품을 자기 생에 끝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그 자신이 정말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리피스는 자신은 친구가 없다는 말을 한다. 자신에게 친구란 대등한 위치에서 꿈을 좇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이 얼마나 허무한 말인지 작가 자신이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 주변에 함께 일하는 동료는 있는데 친구가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말이다.


그에 비해 가츠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삶 전체를 투쟁하는 인물이다. 첨에는 자기를 키워준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검을 잡지만 그런 인정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증명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검을 휘둘러 살인을 하고 목줄을 끊고 도망친다. 그 이후 동료를 만나고 그리피스라는 이상적인 존재에 끌려 성장하면서 나중에는 자신의 삶의 의미는 자기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성공이 보장된 ‘용병단’을 떠나 독립을 결심한다. 심적 독립이다. 이후 망가진 그리피스의 강마 의식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낙인’까지 찍힌 채 다시 처참한 바닥까지 내팽개쳐지고 그곳에서 복수심 하나로 처절한 나날을 살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새롭게 만나는 동료들에 의해 서서히 분노가 치유되면서 ‘복수’ 자체보다는 삶 그리고 가치를 위해 그리피스와 대항해 나가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물로 가츠는 성장해 간다. 여기서 가츠는 사람과 세상 모두에 연결된 캐릭터이다. 이것은 미우라 켄타로가 지향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나름의 암시가 아닐까?


베르세르크에서 주인공 가츠가 하는 유명한 대사가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없는 거야.”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가츠가 한다는 것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미우라 켄타로가 도망친 것은 삶 자체이고 도착한 곳은 베르세르크라는 작품이라는 뜻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곳에 낙원은 없다는 것을 그도 알았겠지만 그럼에도 삶의 밸런스를 찾는 것은 끝끝내 실패한 미완의 완벽주의자.


궤도를 바꿔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 완벽주의다. 그렇기에 지나친 완벽주의는 그 자체로 병일 수 있고 주위에서 그런 증상을 보인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구조 신호일 수도 있다. 자신을 내적 고통에서 좀 꺼내 달라는 신호 말이다. 뭐.. 그렇다는 말이다.


오늘 할 헛소리는 이제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이만 모두에게 평안이 함께 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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