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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l 05. 2021

시네마 천국

다시 시작하는 토토에게

영화 비평을 쓰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나는 영화에 대해서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한 명의 관객이기 때문에 영화 자체보다는 그 영화가 내 안의 것들과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그래서 내가 최종적으로 어떤 것을 느꼈는지를 주로 이야기하려 한다.


시네마 천국은 내가 아직 첫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본 영화였다. 당시에도 영화를 무척 감명 깊게 보았지만 그것은 어린아이와 어른의 우정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이 주된 감상의 포인트였다. 나는 어린 토토도 아니고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토토에 공감하고 그가 성공해서 돌아와 영사기사였던 알프레도가 건넨 영화 필름에 감동하는 장면에서 그가 자신을 위해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킨 것에 감동을 받았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어릴 적에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키스 장면은 다 큰 어른이 되어서 보라고 말을 했고 그래서 그 말에 대한 약속으로 토토에게 그 필름을 건넨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성공해서 자기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근사한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마저 가지고 있었다. 그런 감상을 가지고 본 영화는 정말 오랜 시간 내 안에서 아무 울림도 주지 않고 그냥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야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영화의 마지막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영화는 모두에게 좋은 영화이긴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이제 장성한 나이의 토토들에게 관람이 되었을 때 그 진가가 나타나는 영화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린 토토, 젊은 토토, 장성한 토토 모두의 이야기이지만 영화의 주제가 가리키는 핵심은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느 순간 방향을 잃은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영화였던 것이다.


이 영화를 봤으면서도 나는 영화 속 토토와 같은 바보짓을 똑같이 행하고 있었다. 즉 인생의 교훈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그것의 가치를 미리 알아채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영화였다.


어린날의 토토는 한없이 밝고 명랑하며 호기심이 많고 꾀도 많은 말썽꾸러기이지만 무엇보다 영화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 아이로 나온다.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를 힘들게 꾸려가는 토토 어머니의 삶의 고단함 그리고 심부름을 시킨 돈을 가지고 영화를 관람하는 아이와 그것 때문에 아이를 혼내야 하는 상황, 그 난처한 상황을 슬기롭게 무마해주는 알프레도는 우리 사회에도 꼭 필요한 어른상이다. 아이들은 그냥 눈앞에서 신기하게 빛나는 것을 쫓아 움직이는 것이지 그 움직임에 특별히 ‘악의’ 같은 것은 없다. 단지 세상사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성숙한 행동을 하기엔 토토는 그냥 너무 어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좋아하는 것을 맹렬히 쫓아가는 아이 그리고 아버지의 빈자리 때문인지 자신과 영사기사일에 너무 관심을 가지는 것이 부담스러운 알프레도 그들 사이의 우정은 모자란 지식과 그로 인한 기회 박탈이라는 현실과 반드시 있어야 할 아버지의 부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서로 간의 깊은 애착이었는지도 모른다.


젊은 날의 토토는 좋아하는 일과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서 그것에 자신의 전부를 걸지만 세상과 주변 환경은 그가 원하는 것을 쉽게 그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깊은 좌절 그리고 아물지 않는 상처. 고향에서 고사해가는 젊은 토토에게 이곳을 벗어나 자신만의 꿈과 야망을 이루라고 알프레도는 주저앉은 토토를 일으켜 세워 도시로 밀어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말 이루고 싶은 사랑과 꿈을 좇는 과정에서 한두 번의 좌절을 맛보게 된다. 단 한 번만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로 칼날 같은 위기의 현실 위에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도 한 번의 좌절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흐름에 따라 자신의 삶을 떠내려가게 두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그럴 때 만약 알프레도 같이 다시 한번 일어설 용기를 주는 어른이 주위에 있다면 우리의 삶도 조금은 덜 퍽퍽하지 않을까?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라고 말이다.


장성한 토토, 사회적 지휘와 명성을 얻었지만 왠지 행복하지 않은 토토, 가장 절친한 벗인 알프레도와의 소식도 한참 동안 끊고 지냈고 고향에도 돌아가지 않고 그냥 자신의 일에 열중하면서 마음 가는 대로 여자를 만나고 살아온 토토. 뭔가를 손에 넣은 듯하지만 마음이 허한 그런 상태에서 알프레도의 부고가 찾아들고 그는 고향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이미 황량하게 쇠락해버린 옛 추억의 흔적들만 남아있을 뿐, 과거에 그토록 눈부시던 마음의 안식처는 산산이 부서져 기억의 저편으로 영원히 떠나버렸다. 등졌던 고향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환기하고 잊고 지냈던 젊은 엘레나의 모습도 다시 꺼내보지만 이루지 못한 첫사랑은 여전히 아프고 삶은 괜스레 공허하기만 하다. 뭔가 방향성이 잘못된 듯 삐걱되는 토토의 인생 하지만 나름 이룰 만큼 이룬 인생에서 이제 또 무엇을 얻기 위해 방향을 바꾼다는 말인가?


여기에서부터는 과거와는 방향성이 완전히 바뀌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알프레도가 둘 사이의 사랑을 방해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토토가 더 큰 사람이 되기를 바란 알프레도가 보통의 아버지처럼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토토를 말리고 자신의 꿈을 토토에게 투영하여 토토의 사랑을 좌절시킨 것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한참이 지나 다시 재회한 옛 연인의 모습이 너무 애절하고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론 알프레도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이 장면 이후에 이어지는 마지막 씬들의 감동이 내게는 그렇게 크진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다시 영화를 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알프레도는 불타는 사랑은 언젠가 식어 재만 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도망친 두 사람의 인생에서 남는 것은 오로지 팍팍한 삶이 될 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그러면 그때는 이루어진 사랑마저 깨져 그 가치를 잃고 모든 것을 잃은 채로 암담한 삶을 살아갈 두 사람을 염려한 것뿐이었다.


알프레도는 병사와 공주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뒷부분의 해석은 하지 않았다.


그 부분의 해석은 각자가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공주와 병사가 맺어진다고 하더라도 둘 사이의 신분과 생활방식의 차이는 결국 큰 갈등을 만들 것이고 그것은 사랑이 식었을 때 자신이 고생한 100일의 날들을 떠올리게 하여 공주를 저주하게 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것을 알프레도는 걱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젊은 토토는 그것을 공주가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해하고 해석했다. 그토록 사랑하기는 했지만 토토는 엘레나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대사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토토는 꿈꾸는 아이였다. 영화를 상영하는 것보다 영화를 만드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엘레나와 맺어지기 위해서는 그런 꿈은 일단 접어두어야 했고 그렇게 결혼생활이 시작된다 할지라도 이루지 못한 사랑을 계속 찾아 헤맨 것처럼 이루지 못한 꿈의 흔적이 그의 남은 생을 계속 괴롭힐 것을 알프레도는 알고 있었다. 젊은 날 배우지 못한 것 그리고 용기 없음으로 고향에 고착되어 떠나지 못하고 묶인 몸으로 더 큰 세상을 갈망하면서도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알프레도는 자신과 같은 후회를 토토가 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 것뿐이다.


알프레도는 엘레나에게 분명히 원한다면 그 메시지를 전해주겠다고 했는데 엘레나는 그의 설득에 한번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었다가 다시 쪽지를 알프레도 몰래 남겨두는 것으로 그를 속였다. 그래서 알프레도는 그 이후 당연히 엘레나가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좌절하는 토토를 위해 고향을 떠날 것을 충고했고 고향에 엘레나가 정책 했을 때는 그녀를 보고 좌절하는 것을 원치 않아 토토의 귀향을 원하는 토토 어머니의 바람을 끝까지 말렸다. 그는 죽어서도 자기의 죽음을 토토에게 알리지 말라고 할 정도로 그를 끔찍하게 아꼈던 것이다.


토토와 엘레나는 젊었고 그래서 미숙했다. 자신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운명의 엇갈림이 둘 사이를 더 벌려놓고 말았다. 서로 더 정직했더라면 아니면 서로를 더 믿었더라면 그 둘은 어떻게든 다시 만나 재회할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상대가 자신을 포기했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상대방을 찾는 것은 하지 않고 맘속으로 계속 그리워하며 상대의 그림자를 쫓는 시늉만 한 것이었다. 그녀가 한참 전에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은 그녀를 찾고자 했으면 그는 그럴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알프레도는 고향에 언제까지나 있었으니 엘레나도 그를 찾아 얼마든지 토토의 소식을 물어볼 수 있었다. 결국 둘은 상대가 자신을 포기했다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었다.


알프레도가 남긴 마지막 테이프가 보여주는 것은 그가 고향을 떠나는 토토를 환송할 때 했던 그 말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좋아서 해야 해! 어린 꼬마였을 때 영사기를 좋아했었던 것처럼…”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살라는 것이 알프레도의 가르침이다. 오직 마음이 가는 대로 좋아하는 대로… 거짓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어린 토토의 그 모습 그대로 남은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알프레도의 마지막 유언이라 할 것이었다.


방황하는 마음으로 잊고 있었던 순수함. 토토는 자신을 실패자로 만들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버려진 그런 실패자로 자신을 내면화하면서 평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 마음이 그의 삶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의 이름도 버리게 만들어 엘레나는 왜 본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냐고 물어봤던 것이고 토토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런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다.


토토는 과거의 사랑에 집착하고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버려졌다고 생각하여하지 못한 사랑을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해도 상관없다. 단지  만나서 불륜이나 엘레나의 이혼  둘의 재결합만이 둘의 사랑의 완성은 아닌 것이다. 알프레도가 그렇게 토토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도, 장님이 되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모든 추억을 자신의 방에 꾸며두고 애지중지 하면서 그가  자유롭게   있도록 멀리서 응원한 것처럼 그들도 서로 그렇게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삶은 유한해도 예술은 영원하다. 그들의 사랑은 토토라는 본연의 이름을 다시 찾은 감독의 작품으로 얼마든지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토토는 실패자가 아니다. 그런데 스스로 실패자로 살아왔다. 알프레도의 그 마지막 테이프는 토토에게 그가 잊고 살고 있던 어린날의 순수한 열정 그 자체를 다시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젊은 날의 좌절 이후 평생을 후회 속에서 살고 있던 토토에게 그 필름은 그 자체로 자유의 메시지이고 그래서 그것이 마음속에 닿는 순간 장성한 토토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히는 것이다. 대 영화감독의 눈에 그 조악한 키스 장면의 연결 씬은 그토록 대단한 자유의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대단한 누군가의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젊은 날에 대한, 알프레도에 대한 원망을 씻어내는 화해의 몸짓인 것이다.


!! 너는 언제든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만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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