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터피터 Jul 08. 2021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해, 소통

이 작품을 분명히 본 기억은 있는데 내용이 단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 안에서 깨끗하게 지워져 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에 대한 감상조차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이 작품의 수준이나 완성도 또는 설정의 결함, 이야기 구조의 불완전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볼 당시의 내가 작품과 감정적으로 겹쳐지는 부분이 약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내 안에서 잊힌 것이다. 대부분의 책과 영화 그 밖의 정보들도 이런 식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아무리 붙잡으려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하고 상대를 이해하면서 때로는 미련을 버리는 것이 최선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붙잡기 위해 무수한 시간을 쏟아부으면 분명히 무언가 늘어나고 향상되는 것을 느끼겠지만 그것이 완전히 내 것이 되는 데는 또 그만큼의 유지비가 필요하다. 내게는 근육이 그렇다. 운동을 하면 분명히 살이 붙는다. 하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양을 먹고 계속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특정 상태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에 비 효율적이다. 내가 이 나이에 근육 빵빵 헬스맨이 될 것이 아니라면 그냥 내 꼴을 인정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선에서 타협을 하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 이롭다 할 수 있겠다.


또 서론이 길다. 별 것 아닌 것을 이야기하려고 폼을 잡으니 힘이 들어가는 거다.


내게 나우시카는 단 하나의 장면으로 남아있다. 그것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마스코트 같은 고양이 비슷한 것이 주인공의 어깨에 항상 따라다닌다. 그 생명체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겁에 질린 것인지 놀라서 주인공의 손가락을 꽉 물었다가 서서히 진정이 되면서 문 것을 놓고 다친 손가락을 혓바닥으로 핥아주는 장면이 있는데 분명히 나우시카의 한 장면일 것이다.


으르렁 대기. 이를 드러내고 상대가 으르렁 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잘 판단해야 한다.


이를 드러내는 이유가 포식자로서 나를 잡아먹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겁에 질려서 놀라서 그 반사 작용으로 방어적으로 으르렁거리는 지를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상황을 냉정하게 구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내면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어서 상대가 이빨을 드러내면 그것에 놀라 같이 방어적으로 행동하기 급급하기 때문이다.


포식자와의 대립 상태라면 우리는 긴장하고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 둘의 대립에는 선, 악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에서 만나 두 존재는 그냥 싸우고 투쟁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전쟁처럼 한 번 어떤 일이 방향을 타고 흘러가기 시작하면 그때는 온 힘을 대해서 일단 대응을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상대가 약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좀 대담해져야 한다. 상대가 나를 물고 공격하더라도 냉정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고 그 상대가 진정할 수 있을 때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 겁에 질려서 공격하던 상대는 이빨에 힘을 주다가 문 상대의 반격이 없는 순간 의아함을 느끼고 그런 다음에는 물고 있던 이빨의 힘을 조금씩 풀면서 흥분을 가라앉히게 된다. 서서히 다시 입이 열리고 뒤로 물러나면 그때에야 상대의 몸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자신의 이빨 자국을 보게 되고 순간 미안한 마음이 솟아난다. 다음에는 그것을 핥는 행위로 겁먹은 동물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성공적인 소통을 마무리할 수 있다. 그렇다고 꼭 내가 피를 철철 흘릴 정도로 상처 입을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니 충분한 내공이 없다면 물려준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고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가장 중요한 테크닉이다.


이것은 내가 맹렬하게 사나워지거나 아니면 어떤 공격적 적의를 외부에서 느꼈을 때 종종 내 안에 떠오르는 나우시카의 그림이고 그것이 때때로 나를 진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곤 했다.


우리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너무 방어적이고 그래서 또 너무 공격적이다. 문제는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 이런 태도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큰 불행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아이일 때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어른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그런 지혜가 없다. 자신들이 그런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일방적인 길들임에 익숙해져 버려서 자신들이 본인의 감정에 무지하다는 것 자체를 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평생을 겁에 질린 채로 살아간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 속에서 잔뜩 움츠리고 사방의 공격에 똑같이 맹렬하게 대응한다.


아이들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 쉽게 규율을 따라가는 아이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자신들의 내면이 불안한 것이다. 그럴 때 그 아이들은 왜 자신들의 불안이 생겨나는지 본인들도 전혀 인지를 하지 못하고 그래서 설명도 하지 못한다. 따라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명히 예민하게 화를 내고 있는데 그 이유가 자신들의 이유가 아닌 경우가 많다. 남들이 주위에서 화를 내면서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자기화하여 그것이 이유라고 철저하게 믿고 화를 폭발시키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경우 계속 아이의 이야기를 끌어내면 논리가 무너진다. 아이는 자기 이야기라고 믿고 있던 이야기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순간 자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그것은 아이의 자질과 특성에 따라 다르게 반응이 나타난다.


아이가 망가지는 것은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불안을 제어하는 방법을 모르고 심지어는 불안해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제도 내적으로 부정하면서 자신을 마비시키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른들은 그것을 감지하고 아이의 아픔에 감응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어른들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어른들은 나이만 먹었지 내면은 철없는 아이 그대로 고착되어 불만투성이의 고집쟁이로 성장한 케이스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모두가 아프다.


나에게 나우시카란 저 장면이다. 때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아픔을 동반해야 한다. 나보다 약하고 연약한 무엇이 나를 물었을 때 좀 더 대범하게 그것을 인내하고 참아내어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그것이 어른이 취해야 할 태도인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내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살아야 한다.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고찰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불안과 공포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어린아이인 것이다.


나 역시 그동안 내적으로 아이인 채로 살면서 주위에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 내가 나 아픈 것에 매몰되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인정하고 사과하며 다시 주변에 다가갈 수밖에 없다. 나조차 몰랐던 내 마음들이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나 자신과 가족 그리고 잊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 닿아 우리가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하고 이어질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길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희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