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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l 08. 2021

글래스

언브레이크블, 23 아이덴티티, 글래스

내가 시간이 지난 영화들을 주로 다루는 이유는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큰 틀의 주제 속에 그런 영화의 장면들이 자꾸 연상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감독의 연출 의도를 맞추기 위한 영화 이야기는 거의 쓰지 않는다. 아주 색다르고 특이해서 반드시 그때 받은 감흥을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영화들은 본 이후에는 그냥 세세한 설정이 잊힐 때까지 내버려 둔다. 그럼 내 안에서 알아서 쓸 수 있는 부분만 편집되어 보관되는데 그러다 보니 나의 이야기는 세부 디테일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글래스는 감독이 긴 시간에 걸쳐 연출한 3편의 연작을 맺음 하는 작품이었는데 전작들이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고 나름 독창성이 있어서 호평이 많았던 반면 이 작품은 호불호가 좀 갈라지는 평가를 받았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마지막 작품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 많아져서 긴 연작의 끝맺음으로 의미 있는 연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시리즈를 요즘에 흔한 히어로물로 보자면 마블의 어벤져스 같은 연출이 아닌 것이 아쉬울 수 있지만 단순히 선악 구도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다루어진 작품으로 바라본다면 이 끝맺음도 나름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다.


이 이야기를 인간 본성과 인간의 사회적 쓰임새 그리고 서로 다른 인간들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전체적인 흐름을 다시 살펴보면 그 구조가 나름 훌륭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데이빗은 일단 <재능을 가진 인간> 정도의 포지션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사회에는 여러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모두 자기 재능을 찾고 개발하여 그것을 십분 발휘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냥 자기 신조에 따라 지극히 평범한 삶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고 데이빗처럼 어느 날 우연하게 자신의 재능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도 드문 케이스는 아니다. 그럴 때에도 그것을 적극 발휘하면서 살아갈지 말지는 자신이 결정할 문제이지 타자에 의해 강요되어서 자기 본연의 삶의 궤도를 잃어버리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 것이다.


데이빗이 아들과 함께 자경 활동을 하는 것은 외부에서 보기에 흐뭇한 일이지만 그것은 데이빗 자신의 열망 이라기보다는 아들의 희망과 욕망이 투영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일단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행동을 선택한 본인의 몫이라는 것을 영화는 잘 보여 준다. 영화에서 데이빗의 죽음은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목숨까지 걸 가치가 있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고 행동을 결정하라는 충고의 메시지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타자에게 너무 쉽게 ‘선의’와 ‘최선’을 강요한다. 히어로를 만들고 그 히어로에 그들이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의 짐을 올려놓고는 그냥 손뼉 치며 응원하는 것을 ‘정의’로 착각하는 것이 이 사회의 분위기다.


재능이란 정치적 재능일 수도 있고, 예술적 재능일 수도 있다. 최근에 타개한 베르세르크의 작가처럼 재능 있는 작가는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그들은 작가를 추종하면서 우상화하지만 그 작가의 삶 전체가 어긋나고 있는 것은 알면서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대중은 항상 개인의 사정 따위는 쉽게 무시해 버리는 나쁜 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가이버’ 등의 연재 만화가 중간에 끊어졌을 때 왜 이렇게 활동을 하는 것인지 화를 내며 책임감이 없다는 소리를 하였지만 작가가 더 이상 그 만화를 그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작품이냐 개인의 삶이냐 의 선택지에서는 역시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앨리야는 <상처 받는 사람들> 을 상징하고 있다. 사회에는 아주 쉽게 쉽게 상처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이며 소수자이고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서도 아주 큰 타격을 받고 삶 자체가 무너져 내릴 수 있다. 또한 탄압받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고 광신자들 일수도 있다. 그들은 소통할 수 없는 사회에 분노하고 자신만의 채널로 나름의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마저 안되면 자신만의 신념과 나름의 대의를 가지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극단적인 폭력과 파괴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극단주의자들은 그들의 고통까지 극단적으로 인내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투쟁하기 때문에 불통의 사회에서는 더욱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케빈 <갈등하는 사람, 불안정한 사람> 의 모습을 잘 형상화했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는 사실  불안정한 사람들이 많다. 사회적 필요와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구조 안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많은 감정들을 부정하며 살아가도록 교육받고 길들여진다. 케빈은 다중인격적 인물로 묘사되지만 다중 인격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 안의 각종 감정들이며 여러 다양한 특색들이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 같은 미숙함을 함께 가지고 있고 차분함과 명석함, 상냥함 등의 특성과 함께 이기적이며 난폭한 기질 또한 내부에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일방적으로 부정하고 억압하여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 눌린 감정은 어느 날 분노라는 괴물의 모습을 하고 우리 밖으로 뛰쳐나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 슬픔,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과도 제대로 소통해야 하고 그런 감정들을 능숙하게 다루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일방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드러내고 익숙해질 필요도 있는 것이다. 감정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로는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그냥 자극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특정 감정에 압도되었을 때 우리가 그것에 사로잡혀 자기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자기 자신과 주변에 파괴적 행동을 할 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을 이 시리즈는 잘 보여주고 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단순히 ‘선악’이라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되지 않아서 갈등하고 대립하고 싸우고 함께 공멸해가는 과정을 글래스는 보여주고 있다. 엘리 스테이플 박사가 보여주는 모습은 표준을 벗어난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시스템> 의 모습을 잘 대변하고 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소통하고 화합하여 만들어가는 통합보다는 모든 모난 것들을 두드려 평평하게 만들고 그렇게 하여 안정과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을 가치로 판단하는 시스템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면 가치라는 것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리고 우리의 모순적 본성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선이라는 것이 목숨을 포함한 무한 희생을 할 만큼 개인에게 가치 있는 것일까? 시스템 안에서 진짜 적은 누구일까? 우리는 정말 깨인 생각을 하고 있는가? 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기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고 그런 방향에서 살펴보면 나름의 구조와 결말은 훌륭한 끝맺음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안의 불안에 아직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너무 오래 불안을 키워왔기에 케빈의 비스트만큼 덩치가 커지고 사나워져서 일단 한번 밖으로 나오면 한참 동안 나를 괴롭히며 놓아주지 않는다. 이 녀석을 인정하고 길 들이고 친해지는 방법을 빨리 체득하는 것이 나에게는 시급한 임무라고 할 수 있겠다. 내 안의 비스트를 달래면서 이 영화를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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