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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l 12. 2021

전환

세계의 균열

인간의 내면세계는 아주 쉽게 부서질 수 있다. 특히 어린아이가 가지는 내면의 질서와 체계는 더욱 충격에 취약한 부분이 있다. 물속에서는 활달하게 움직이더라도 뭍에 올라오는 즉시 숨이 끊어지는 특정 물고기처럼 인간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세계관 안에서는 활달하게 행동하다가도 다른 세계로 옮겨진 이후에는 바로 생명력을 잃어가는 그런 인간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 그런 종류였다. 나는 스스로의 취약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정신적으로 여러 보호막을 두르고 다녔다. 어릴 적 나의 동네에서는 그 보호막을 모두 인정하고 나를 지지해 주었기에 마음껏 장난을 치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온갖 것들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어릴 적에 균형을 잡는 것에 약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동생을 업고 나의 손을 잡고 가는 데 따라가면서 자꾸 넘어져서 어느 순간 발만 내려다보고 걷다가 발을 팔자로 벌리고 걷기 시작하면서 넘어지는 것이 확 줄어들자 그 이후 스스로 팔자걸음을 선택해서 걸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건 무엇을 스스로 체득하고 결정한 거의 첫 부분이어서 그런지 항상 뚜렷하게 기억이 나고 그 장소가 집에 오는 쪽 오르막 위로 향하면서 다리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도 선명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다른 애들이 밀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쓰러지면 아픈 것과는 상관없이 큰 모멸감을 느끼고 수치스러워했었다. 그것을 내 약점으로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특히 더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학교를 들어가고 아마 첫 해였던 것 같은데 그때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동급생 중에 나보다 훨씬 덩치가 좋던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고 그 아이가 나를 힘으로 밀어서 넘어뜨려 제압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게 너무 부끄러워 그 아이에게 몇 번 더 일어서서 힘으로 밀어 같이 상대하려고 했지만 그 아이는 근력이 그리고 심지어 힘을 쓰는 요령도 나보다 훨씬 좋았다. 나는 그 애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의 모멸감은 나를 정말 힘들게 했다. 당시에는 남아선호가 분명한 시기였고 남자아이가 부엌에 들어가려고 하면 그것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나누어지다 보니 남자가 여자에게 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뛰어다니고 장난치고 하는 것과는 다르게 힘으로 붙어서 그 힘에 밀린다는 것에 이렇게 충격을 받아본 적이 없던 나는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힘들어했던 것이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왠지 모르게 그냥 눈물이 났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자각이 서러웠나 보다. 그때 집에는 외할머니만 계셨다. 부모님이 외출하시고 외할머니가 형제를 돌봐주기 위해 와 계셨다.


외할머니는 밥 먹다가 갑자기 애가 우니까 왜 우느냐고 물어봤고 나는 당시 할머니가 무섭고 나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 취급받는 것이 두려워져 학교에서 동급생과 싸웠는데 졌다는 말만 하고 말았다. 그게 너무 분하다는 말을 했지만 여자 아이에게 져서 그렇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러자 외할머니는 싸움 잘하는 것보다 공부 잘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면서 그런 것 무시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나를 격려하셨다. 그 순간 나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면 그 모든 것이 다 상관없고 나중에는 그게 제일 중요하다는 그 말을 구원처럼 받아들였다. 그래 그럼 되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켜 버렸고 나는 내 마음의 쓰라림을 그렇게 무마하는 법을 배웠다. 나쁜 속임수였고 이후 이런 방식이 계속 나를 지배하면서 좀 더 정직하게 정신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나는 당시 좀 더 건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여자 아이에게 졌다는 그 사실이 내가 정면으로 문제를 직시하고 강해지는 방법을 찾는 것 자체를 막아버렸다. 이후에도 공부나 책 읽기, 오락, 공상 등 정신적 활동에만 매달리고 태권도 등의 육체를 훈련할 방법이 동네에 생겼을 때에도 그것을 피해 좋아하지도 않는 주산 공부를 선택하는 결정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몸이 강한 것보다는 공부를 잘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이상한 우열관계를 스스로 내재화한 결과였다. 즉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 그것을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고 그냥 순간의 위안을 위해 조언을 하면 아이는 그 조언을 정말 굳게 믿고 깊숙하게 내면화하여 그 믿음을 가지고 정말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후 정말 공부는 열심히 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항상 반장을 맡아서 했고 아이들 앞에 서서 선생님 대신 아이들을 통제하고 지휘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선생님들과도 엄청 친숙하고 각종 일지를 정리하고 학교 행사를 준비하고 처리하는 모든 일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런 분위기가 하나의 보호막이 되어 나의 약한 자아를 잘 둘러싸고 있었기에 스스로 자신감 있고 용감한 아이라고 착각하며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아이들에 모범이 되어야 했는데 스스로는 잘 부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노래 역시 선생님의 풍금에 맞춰 혼자 서서 부르는 일이 당연시되었다. 나는 정말 어릴 때에는 노래가 싫었다.


전학 후 그런 보호막은 무력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존중은 없었으며 학교의 어딘가에는 폭력이 상존하는 것을 감각하고 있었고 학교생활 자체가 너무 낯설게만 느껴져서 힘든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친한 무리가 있어서 끼어들기 힘들었고 노는 방식도 시골과 완전히 달랐다. 당시 아이들이 롤러장 이야기와 극장 이야기 그리고 백화점 위의 놀이기구 등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고 방송조차 지방방송과 경기지역의 방송의 내용이 달라서 아이들과 대화에서 무언가 이질감이 있었다. 자신감이 점점 떨어지면서 나의 멘탈에 분명히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야 하는 시기에 어떻게 방향성을 잡아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중간고사가 끝난 얼마 후 아이들의 장기 자랑 시간이 있었다. 아이들이 앞에 나서서 자기 기량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은 성적과는 상관없이 노는 것에는 확실히 재능이 있어 보였다. 시골에 있을 때는 아이들끼리 가요를 부르는 일은 별로 없었다. 주로 만화 주제가를 부르고 놀곤 했지 가요는 우리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는데 부천에서는 달랐다. 당시 유행하던 가요를 부르고 어떤 아이는 팝송을 부르기도 했다. 티브이에서 하는 개그프로를 흉내 내는 아이도 있었고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내가 아이들에 지목되어 앞으로 나서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 앞에 서는 것이 항상 익숙했지만 그 순간에는 갑자기 숨이 탁 막혔다. 지금까지의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내가 아는 무엇을 하는 것이 어색했다.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라고 소리를 치기 시작했지만 내가 아는 노래는 만화 주제가와 학교에서 배운 동요가 전부라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선생님이 시간 없으니 빨리 하라고 손짓을 하셨고 나는 하는 수없이 만화 주제가를 크게 불렀다.


무얼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름 큰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역시 반응은 좋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에이~’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내 얼굴은 완전히 빨개졌다. 아마 귀까지 빨개진 것 같았다. 그걸 보고 아이들이 웃었다. 낯설었다. 모든 게 낯설 게 바뀌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갑자기 급격하게 흔들리며 전환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냥 자는 도중에도 얼굴이 빨개지는 기분이 들어서 잠에서 깨곤 했고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밖으로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집에서 밑으로 내려가면 놀이터가 있었기에 거기까지 뛰어갔다 오기 위해 달렸다. 그날은 아침 기온이 쌀쌀했다. 뛰어서 놀이터까지 달려갔지만 땀이 나지 않아서 멈추니 바로 서늘해졌다. 숨을 고르고 체온이 식으면서 몸이 뻣뻣해지는 기분을 느끼는데 낯익은 얼굴이 놀이터로 들어섰다. 같은 반의 여학생이었다. 그 애는 반에서 1등을 하는 아이라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애도 나를 알아봤을 터인데 아는 척을 하지 않아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그냥 무안한 기분이었다. 아버지와 동생인 듯한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들어서 가벼운 아침운동을 하고 철봉 앞에 서서 아이가 뛰어오르자 아이 아버지가 뒤에서 잡아서 그녀를 높이 올려주었다. 그 애는 철봉에 매달리기를 한참 하다가 부르르 떨면 다시 아이 아버지가 잡아서 밑으로 내려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 이야기부터 여러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냥 신기했다. 우리 집에서는 그런 식으로 학교 이야기와 공부하는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부모님과 하지 않았다. 그 애가 나를 의식하는 것 같아서 나도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가 아버지가 건네주는 줄넘기를 받아서 넘기 시작하자 나도 줄넘기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놀이터에 더 남아있기가 무안해져서 제자리 뛰기를 조금 더 하고 바로 밖으로 나와 다시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시골에 있을 때 한 번도 우리 집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부천에 올라오니 조금 분위기가 달라졌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훨씬 다정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가 관심을 가지는 것에 부모님도 같이 관심을 쏟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그런 것이 신기해지면서 무언가 욕심이 생겼고 불만도 생겼다. 그런데 그런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방법은 없었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내가 무얼 하면 되는지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우리 식구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다. 변화를 시작하기 위해 올라왔지만 막상 그 상황이 펼쳐지자 모두가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 지금에는 그냥 느껴진다. 한 번도 버스를 타고 통학하지 않았던 학교를 아침 일찍부터 나가야 하는 형이나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너무 많아서 2부제 수업을 들어야 하는 동생이나 모두들 이 변화가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압도당하는 순간에 우리들은 이 변화를 그냥 받아내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방법도 없었다. 맨땅에 헤딩을 그렇게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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