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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l 19. 2021

상처 입다.

파국

뭔가 흔들흔들거리고 불안했다. 그냥 모든 환경이 낯설고 학기 초의 폭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집안 분위기는 딱딱했다. 외할머니는 체력적으로 4형제를 돌보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형이 부천으로 올라오고 자기 방을 가진 뒤로 다른 형제들이 자기 방에 들어오는 것을 엄청 싫어했다. 접근금지 구역이 생긴 것이다. 시골에 있을 때도 자기만의 비밀공간이 책상 안쪽에 있었지만 이후에는 아예 방 하나를 독점해 버렸다.


부모님이 안 계셔서 나는 다른 형제들과 안방에서 주로 잤다. 티브이는 그쪽 방에 있어서 상관이 없었지만 형은 나 이상으로 생활패턴이 바뀐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형은 특히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많다. 아버지가 용접 등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데 소질이 있으셨는데 형도 프라모델 조립부터 기계와 전자기기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5학년 때 다른 지역에서 전근 오신 선생님께서 갑자기 라디오 키트를 조립해서 나가는 경진대회에 나를 뽑아 준비를 시키셨다. 나는 솔직히 큰 관심이 없었다. 복잡한 키트를 납땜해서 만들어낸 라디오가 예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내 마음을 사로 잡지는 못했다. 집에 훨씬 큰 라디오가 있어서 그것을 사용해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전파 잡기가 쉽지 않았던 까닭에 나는 그냥 라디오를 가지고 다른 무엇과 교신을 하는 상상을 하면서 노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경진대회에 형이 관심을 보였다. 형은 자기 때는 그런 것이 없어 직접 해보지 못했다가 내가 경진대회에 나가게 되니 그걸 엄청 부러워했고 또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줬다. 나는 그것 때문에 키트를 조달하기 위해 서너 번 시내에 나가는 일이 좋았고 경진대회에서 결국 입상을 하기는 했다. 도대회까지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것으로 나는 만족했고 형은 엄청 실망했었다. 그때부터 우리 형제의 기질이 이렇게 달랐음을 나는 알아차리고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처음에는 형을 모방하는 따라쟁이였고 오락실 사건 이후에는 형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추종자였다. 그냥 형이 앞에서 길을 터놓으면 그것만 따라가도 되겠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 당시의 나는 온갖 이야기를 수집하고 또 만들어내고 아이들과 그 이야기를 게임처럼 플레이하는 것을 즐겼다. 특히 잡지에서 이야기가 분기점을 타고 몇 페이지씩 도약하여 결과가 나뉘는 그게 너무 좋았다. 각종 괴물과 호러 이야기에 그렇게 푹 빠져 나를 집어넣고 온갖 망상을 하면서 모험담을 만들고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사방을 돌아다니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마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보는 걸 즐겼지만 난 내가 이야기꾼이 될 기질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무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원래 자신의 눈에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글로 나 자신을 멀리서 관찰하며 글로 옮겨 적지 않았다면 현재도 전혀 자각하지 못했을 사항이다. 나는 내가 형의 딱 닮은꼴이라고 생각하고 따라갔는데 지금 보니 형과 나는 극과 극의 취향이었다.


어쨌든 형이 아버지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은 또 하나의 점은 바로 바깥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다는 것이었다. 외부적으로 너무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 집안에서는 그 긴장을 좀 풀어놓아야 했고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자기 방에 들어가면 그냥 그 자체로 사납고 민감한 상태로 돌변했기 때문에 집에 있는 형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제일이었다. 일본 만화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에 나오는 그 스토리인데 거기에서 여자가 집에서 허물허물 거렸다면 형은 그냥 집에서 그 자체로 전투태세였다. 다행히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 마주치는 경우가 적었지만 집은 항상 긴장 상태였고 나도 그래서 더 아무 말도 못 하고 식구 전체가 스트레스를 쌓아가면서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여름 방학을 하자마자 나는 동생들과 고향으로 내려왔다. 형은 보충수업 때문에 남았고 외할머니도 당연히 집에 남으셨다. 나는 외삼촌 댁으로 갔고 오랜만에 내려온 시골은 그 자체로 너무 자유로웠다. 하지만 일단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생각보다 방학숙제가 많았고 그것에 열중하면서 친구들을 만나볼 생각을 했지만 막상 만나려고 하니 긴장되었다. 아이들이 서울 가서도 기죽지 말라고 했지만 난 사실 완전히 기가 죽어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뭔가 좀 허세를 부릴 필요가 있었기에 나는 일부러 부천에서 아이들이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던 그 몸짓을 내려와서 시골에서 연습했다. 부천에서도 어색해서 안 하던 그것을 연습을 해서 아이들에게 선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한 건 나름 잘 지내고 있다는 과시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내 맘이 많이 불안한 상태였다는 걸 그때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부천에서 학교를 다닐 때보다 아이들과 방학을 보내면서 물놀이도 하고 하는 것이 확실히 좋았다. 오랜만에 자전거도 타고 수박도 실컷 먹고 이야기도 많이 하고 뭔가 어색한 부분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답답하던 부천 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느껴졌다. 중학생이 되면 이제는 다시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맘에 더 아이들과 어울리고 장난쳤다. 그러던 중 친구 하나가


“니 그 어깨 으썩거리는 건 어디서 배웠나? 부천 아들은 그리 하나?”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같이 놀던 동네 형이

“야는 올라간 지 반년밖에 안된 놈이 디게 서울 놈인 척한다..”

“내가 뭘?”

“니 기억 안 나나? 아까 둘이 자전거 타고 오면서 내가 뒤에서 흔드니까 니가 뭐라 그랬는지 기억 안 나나?”

“그냥 내려라고 했잖아.”

“그래 니 전에는 안 그랬잖아.”

“전에는 뭐라 그랬는데?”

“전에는 내리, 내리… 이리 말했지.”


순간 정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사람에게는 남이 발견해서 벗겨도 상관없다고 의식하고 쓰는 가면과 자신도 모르게 자아와 내면을 보호하기 위해 쓰는 가면이 따로 있다. 만약 자신도 모르게 쓰고 있던 이 가면을 남이 지적하면서 강제로 벗겨내 허약한 자신의 내면을 직면하게 되면 때론 무의식적으로 힘겹게 쌓아 올린 허위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그때 그랬다.


난 나도 모르게 부천에서 시골 말투를 고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그걸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만큼 학교에서 말투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컸지만 누구에게 말할 사람도 없었기에 내면에 꾹꾹 눌러두고 있던 것을 이런 식으로 지적당해서 내가 깨달아 버리는 그것이 너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애들 말대로 서울 놈인 척하기 위해 온 힘을 다고 있는 내 모습이 위선자, 배신자 같이 느껴져서 더 부끄러웠다. 내가 얼굴이 새 빨개져서 가만히 있자 아이들은 나를 두고 일단 자기들끼리 먼저 간다고 뒤에서 따라오라고 했다.


난 그때 아이들을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외삼촌 댁으로 갔다. 그리고 며칠 동안 방학숙제를 마무리하고 그대로 아이들한테 인사도 없이 부천으로 올라왔다. 올라오는 내내 난 울었다. 내 안에 무언가가 터져서 무너졌는데 그게 뭔지 몰랐다. 그냥 눈물만 나오는 무엇이었다. 분한 것도 아니고 뭔가 슬프고 가슴이 아픈 그 무엇이었다. 난 이후 시골 친구들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전까지 주고받던 편지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마치 큰 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는 것처럼 난 그렇게 고향을 떠나 부천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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