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하다.
“쏴아아 아아~~~.”
빗소리, 가끔씩 잠들기 힘들어 들썩일 때 어플에서 빗소리를 찾아 듣곤 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빗소리는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인공의 소리가 되어버렸다. 난 유난히 빗소리에 안정감을 느끼는 것인지 많은 불면의 밤을 이 빗소리와 함께 했다.
오늘 습한 기운을 좀 가시게 하기 위해 문과 창을 모두 열었다. 그리고 점심을 챙겨 먹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나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었다. 내 몸 군데군데가 긴장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뭉쳐있다. 그래서 더 힘을 뺀다.
“쏴아아 아아~~~.”
갑자기 빗소리가 들린다. 소나기 같다. 빗소리가 크게 나기 시작한다. 열어둔 창으로 비가 몰아쳐서 조금 창을 닫지만 그래도 완전히 닫지 않고 소리가 다닐 통로를 만들어둔다. 이번 여름이 오기 전까지 꽤 여러 번 비가 왔던 걸로 아는데 기억나는 빗소리가 하나도 없다. 내 마음의 문이 항상 닫혀 있었기에 그래서 귀로 소리가 들려도 그것이 내 가슴까지 닿지는 않았나 보다. 이번 빗소리는 내리는 즉시 내 마음에 닿았다. 이 이미지와 소리는 이제 나의 인생 곳곳에서 생명력을 얻고 내가 힘이 들 때 내 곁에서 날 달래 줄 것이다.
인생에서 큰 재산을 얻었다. 크게 내리던 빗소리가 글을 쓰는 동안 잔잔해진다. 바람이 조금 더 불지만 빗소리는 안정적이다. 정적이다. 사방이 어둑해져서 방의 불도 꺼본다. 소리가 더 멀리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와 창에 부딪히는 것이 느껴진다.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창으로 빠져나간다. 저 멀리에서 우르렁 소리가 들린다. 천둥까지 치려나 보다.
삶을 살아가면서 보는 것, 이해하는 것에만 너무 치중했던 것 같다. 삶은 때로는 그냥 느껴야 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자연의 소리엔 생명력이 있고 냄새가 있고 온도도 있다. 바람이 내 곁을 스칠 때 서늘해지는 감촉이 좋고 약간 비릿하게 느껴지는 냄새도 좋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이 자체로 충만하다는 것을 감각한다. 깊게 들이쉬는 숨에 아직 뭔가 가슴 끝쪽이 저릿한 듯 하지만 그래도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난 살아있다.
다시 저 끝쪽에서 우렁, 우렁 하면서 공기가 울린다. 빗소리 사이에 작은 벌레소리와 새소리도 미묘하게 끼여있다. 이토록 사람 사는 소리 없는 자연 자체를 언제 들어보았는지 기억이 아득하다. 내 어릴 적 외할머니 집에서 나무마루에 누워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감상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여름 그때는 매년 제비가 찾아와서 처마 밑에 지어진 자기 집에서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여름 내내 시끄럽게 굴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그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나의 여름의 기억은 왜 거기에서 멈춰진 것일까? 그 이후 무수히 많은 여름을 보냈음에도 따로 기억나는 행복한 소리와 감각이 없는 것이 조금 아쉽다.
‘번쩍’
빛이 번쩍이고 큰소리가 지난다. 아마 비가 조금 더 세게 오려나 보다. 여름이다. 분명히 내가 어릴 때 감각하던 그 여름이다. 이상하다 어린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그 많은 시간을 건너뛰어 이렇게나 동질감을 느끼는 단 하나의 여름 속을 지금 내가 지나고 있다는 것이 그냥 좀 이상하다. 기억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오히려 가까운 시간들이 내게는 더 멀게 느껴지고 다시 떠올리기 힘들다. 최근의 시간들은 너무 흐릿하고 색이 없고 밋밋하기만 했다. 내가 그만큼 감각을 닫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마 외부의 시선, 소리가 다 싫었나 보다.
빗소리가 지난다. 오늘 내 곁으로 지난 시간들이 자꾸 찾아든다. 다시 만난 이 모든 게 여전히 반갑다. 그리고 고맙다. 나의 무심함에도 잊지 않고 다시 찾아주어 정말 고맙다. 소나기가 지나간다. 내 마음이 조금은 젖어 촉촉해지는 것을 느낀다.
소나기가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