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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l 18. 2021

서시

다시 마주치다.

내게 시는 항상 거대한 암호다.


내가 스스로 한 번도 문과적 재능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고 오직 이과생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살아온 배경 중에 ‘시’는 큰 지분을 차지하는 요소이다. 나는 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엇인지 인지는 하지만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나는 오직 이야기로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시의 함축성은 항상 그 자체로 암호같이 내게 다가왔고 그 암호를 풀어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내기에는 나의 가진 지식과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시를 이해할 수 없는 나는 문과적 감수성이 없다고 스스로를 진단했다. 그런 내게도 보는 즉시 큰 울림으로 나의 내면 속으로 들어온 몇 안 되는 시가 존재하고 ‘서시’는 그중 하나이다. 읽는 즉시 무언가 아픈 감성이 그대로 내게 전해져서 슬픈 시가 고교시절 내가 읽은 ‘서시’였다. 윤동주의 시에서는 그 자체로 고뇌하는 영혼의 향기가 느껴졌고 한없이 나약하지만 그럼에도 더 넓은 세상을 그대로 끌어안기 위해 노력하는 정신적 몸부림이 전해졌다.


그래서 나는 단 하나의 시 ‘서시’를 외우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일정 부분 성공했다. 하지만 곧 그 노력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에서 지워진 것이다. 거의 반년을 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외우기 위해 노력하고 또 했지만 실패하고 나서 나는 정말 나의 뇌가 미쳤거나 내 머리의 어딘가 구멍이 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서시를 외우지 못한다. 그런데 그래서 나는 매번 ‘서시’를 만날 때마다 새롭다.


처음 나에게 강렬함을 안겨 주었던 ‘서시’를 때때로 삶의 어느 장면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한동안은 그냥 무덤덤하게 스쳐지나갔다. 익숙해진 연인에게서 더 이상 가슴 떨림을 느끼지 않고 친숙한 느낌과 편안함을 가지게 되는 그 현상처럼 일상에서 종종 마주하는 ‘서시’는 그렇게 나에게 어떤 느낌에 대한 ‘추억’으로만 박제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온몸으로 서시를 끌어안고 기억하고 내 안에 보관하려 노력했던 그 열정 자체를 잊어버렸고 서시는 그냥 어느 순간 예쁘고 아름다운 보통의 시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시 마주한 ‘서시’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내 글에 라이킷을 눌러주는 몇 안 되는 분들 중에서 새 얼굴이 보이면 그분의 프로필을 읽고 흥미가 동할 때 그분의 글을 찾아간다. 많은 글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럼 그 속으로 또 한참 빠져 들어갈 테니 말이다. 그런데 제목에 옆집 소음 문제가 보이고 나도 최근 그 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어서 내용을 읽어 나갔다. 그런데 그 글의 마지막에서 전혀 뜻밖의 ‘서시’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인어수인 [인공지능! 옆집 소음 문제를 해결해줘]  https://brunch.co.kr/@suinswan10/68


인어수인님의 브런치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


그렇게 만난 서시는 모든 구절이 새롭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어린 날의 나는 정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한 점 티 없이 맑고 순수하게 그렇게 세상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좌절했다. 그리고 ‘서시’를 볼 때마다 실패한 첫사랑에게 나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그렇게 이 시를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부끄럼 없는 삶이라는 것이 사실은 매일매일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진 것이 아니라면 일상을 살아가는 순간순간에서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삶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순적 존재이다. 선을 추구하지만 악과 이익에 맘이 자연스레 동하고 그것에 익숙해진 몸은 자신도 모르게 편안함과 안락함을 쫓아 움직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존재적으로 내적 갈등을 한다. 그 과정에서 부끄러움은 필수이다.


무수한 실패를 경험했고, 소중한 인연을 놓쳐버렸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지금은 남루하고 초라하다. 하지만 그래서 좋다. 나는 마음에 거지 옷을 입고 있다. 깨끗하고 정갈한 옷은 보기에 좋지만 구겨지고 더럽혀질 것이 두려워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하지만 거지 옷을 입고 있는 지금의 나는 내 편한 대로 움직일 수 있고 원하다면 길 한가운데 드러누워 피곤한 정신을 잠시 쉬어갈 수도 있다. 나의 내적 자유는 결국 나의 무수한 실패에서 도출된 결과물이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란 매일매일을 부끄러워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래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럼에도 최선을 다한 나의 삶에 만족하면서 웃을 수 있는 그런 삶이라고 지금은 새롭게 해석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별을 언제 본 적이 있었을까? 나의 어린 시절에 나의 집 앞에는 동산이 있었고 집 밖을 나오면 까만 어둠과 함께 온 하늘이 별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을 다녀오면서 불 꺼진 동네의 어둠 속에서 나의 마음을 달래줄 하나의 위안이 그 별빛들이었다. 나는 어둠에 삼켜지는 것이 두려워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면서 뜀박질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하늘을 보지 않는다. 항상 나의 생각이 나를 가득 채워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땅을 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나 스스로의 세계에 갇혀 버린 것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세상을 보는 마음이다. 지친 마음은 항상 고개를 떨구게 만든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란 어두운 밤 속에서도 그 어둠에 집어삼켜지지 않고 더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그리고 자신의 꿈을 직시하는 용기이다. 그리고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란 결국 모든 사람들이고 모든 생물들이다. ‘선’과 ‘악’에 상관없이 모든 것은 죽음을 맞이한다. 내편과 네 편을 가를 것 없이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 평등하고 불쌍하고 가련하다. 세상을 연민으로 감싸 안을 수 없는 사람은 문학의 길로 들어서지 말라고 하시던 박경리 선생님의 말씀과 그대로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나는 일생을 나에게 주어진 길이 무언지 몰라서 헤매고 방황했다. 하지만 한참 어린 나이에 윤동주 시인은 그것이 참으로 힘든 길인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택했고 택한 대로 살아갔다. 내가 ‘내게 주어진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나 자신이 너무 나약하여 그 길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가다가 쓰러지면 안 될 것 같아 그 길에 들어서는 것을 주저했다.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그리고 아프더라도 주어진 길을 가야만이 삶은 살아진다. 성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사는 것이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분명 오늘 밤에도 별은 바람에 스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감각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너무 많은 소음과 빛과 환영에 우리는 별빛이 항상 우리 곁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별빛이 바람에 스치고 있다는 그 자체를 잊고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다시 만난 ‘서시’, 얼굴에 잔주름이 자글 하지만 여전히 어여쁘다. 가슴이 시리도록 벅차지는 않지만 대신 더 따뜻하다. 나는 또 ‘서시’를 잊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다시 삶의 어느 부분에서 만난 ‘서시’는 그때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내 삶에 작은 미소를 보낼 줄 것을 안다. 그래서 언제나 ‘서시’는 내 맘 속의 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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