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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l 17. 2021

광분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오늘 버스를 잘못 탔다.’


우리는 익숙함이라는 관성에 의해 종종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어제 이사를 했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버스를 타야 함에도 익숙한 무엇이 내게 접근하면 나의 모든 행동은 그냥 반자동모드로 실행이 되고 어느 순간 이상함을 느꼈을 땐 이미 버스는 출발한 후이다. 이 버스가 어디로 갈지는 잘 알고 있다. 나의 기존 거주지로 나를 데려다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버스의 모든 정류장이 내게 익숙한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 한 번도 내려보지 못한 정류장은 그 자체로 내게는 새로움이다. 익숙함 속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는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오늘 나의 일과는 아니다. 나는 어제 이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이제는 남의 글은 좀 덜 읽어야지 하고 어제 생각은 해놓고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그냥 브런치를 눌러 오늘의 추천 글을 생각 없이 클릭해버렸다. 그리고 무언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또 하나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 글에서 파생된 느낌이 오전과 오후 내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결국 또 앉아서 글을 쓴다.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정리하지 않으면 그 생각이 언제까지고 내 머릿속을 유령처럼 떠돌 것을 알기에 여기에 작은 살풀이를 준비하는 것이다.


일단 딱 하나의 글을 읽어본다.


이소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일]  https://brunch.co.kr/@flthfkd/79

이소라님의 브런치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화가와 그 뒷이야기. 최근 폴란드에서 생산된 문화들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위쳐 같은 판타지 이야기에서부터 게임, 그림 등에서 자주 폴란드라는 국가명을 듣게 되어 점점 친숙해지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림에는 문외한이라 그림 자체에 대한 설명과 스토리를 그렇게 즐겨 찾아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광분이라는 그림 자체가 주는 박력은 작게 축소된 모니터를 통해서도 나를 충분히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가 자신이 삶의 거의 마지막 순간에 그린 그림을 스스로 파괴하였다는 스토리는 나에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시 한번 그림을 보게 만들었다. 무엇 때문에 그림을 파괴하였을까? 그것을 우리는 끝내 알 수 없다. 단지 우리는 그의 스토리와 그림을 통해 우리 자신이 가진 내면을 또 다르게 투사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림의 말은 화가의 분출하고 싶은 억눌린 내적 자아처럼 느껴졌다. 뭔가 훨씬 더 거칠고 야성적이며 야만적인 그래서 문명의 세계에서는 그 자체로 허용되지 않는 살아있는 날 것 그대로의 감정들을 화가는 세상에 풀어놓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것을 억누르는 것은 항상 이성이라는 끈이다. 그 이성은 거친 말을 한껏 달래보고 있고 그로 인해 말은 더 이상 미쳐 날뛰지 못하지만 그래서 왠지 광분이라는 제목에 걸맞지 않게 그림의 말은 너무 얌전해 보인다. 뭔가 어마어마한 힘은 느껴지지만 그 힘을 그대로 세상에 표출하고 있는 느낌은 아니다.


화가가 어느 순간 이 그림을 파괴했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그 자체로 내게는 자기 예술의 완성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광분하는 거친 말, 날뛰는 말.. 자제되지 않는 자신 내면의 어떤 거친 욕망을 그림으로 완성하고 싶었을 화가에서 여성의 형상을 한 저 모습은 어쩌면 그 자체로 족쇄였을지도 모르며, 세상과의 타협이었을지도 모른다. 광분이라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감정과는 다르게 아름다움은 세상 거의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가치이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이 아닌 자기 예술의 세계에서 조차 무언가와 타협하여 작품을 완성하였다는 분노가 화가 자신을 더욱 절망하게 만들었고 폐병으로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기 본인의 욕망에 충실하지 못하는 삶의 문법에 길들여진 예술가는 그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좌절스러워 스스로의 그림을 파괴한 것이 아닐까? 인정이나 돈이 아니라 자기 정신의 자유를 너무 손에 넣고 싶었기에 그런 행위를 한 것은 아닐까? 나는 나 자신을 이 그림에 투영해 본다.


나는 언제나 ‘정신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는 것인지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무언가를 하면서 열심히 나름대로 몸부림치기는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세상보다 나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가 나를 항상 힐난하고 조롱하고 학대했다. 현실과 타협하고 인정받고 돈을 벌고 가정을 꾸려서 빨리 어른이 되라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반항했지만 나의 저항은 항상 무력했고 그래서 비참했다.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무엇을 한다는 느낌과 감각이 항상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하여 공허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내가 꾸준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이 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의 글쓰기는 그 자체로 내 삶의 흔적이며 내 저항의 증거들이다.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 꿈틀 되는 작은 몸부림이다. 내 안에도 저 말처럼 날뛰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런데 그것은 내 내면의 세계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풀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나의 세계관이 너무 좁고 협소하여 나의 모든 감정들이 온통 소용돌이치면서 하나도 해소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인정이나 돈을 바라고 거기에 내적 자유까지 덤으로 얻으려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탐욕이다. 내적 자유란 결국 조금은 더 피곤하고 힘든 삶에서 만들어진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에서 행복을 느낄 수는 있지만 우리의 정신은 그만큼 나태해진다. 무소유, 덜 가지고 베풀 수 있는 마음, 남의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삶은 결국 조금은 불편한 삶이라는 말이다. 그런 길을 가는 것이 무서운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겁 많고 나약한 내가 그 길을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한참 전에 정해진 것이 아닐까?


정신이 공허해지면 온갖 자극에 중독이 된다. 정보에 대한 집착도 어쩌면 공허한 마음에서 비롯된 증상이다. 이제 글쓰기로 나의 마음의 울타리를 단단히 세워야 한다. 내 안에 날뛰는 저 거친 야생마와 같은 감정들이 충분히 뛰어놀 수 있을 만큼 품이 넓은 정신과 세계관을 만들어야 하며 외부의 의견과 관점이 그대로 내 안으로 침투하여 온통 내 정신을 휘저어 놓는 것도 더 이상 용납하면 안 될 것이다. 그냥 내 것과 맞지 않는 것들은 내 안에 들이지 말고 흘려보내자. 어떤 특정 감정을 유발하고 나를 격앙시키고 도발하는 외부 자극에 함께 맞대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생각은 그냥 생각일 뿐이다. 다른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낄 준비가 될 때까지 나의 글에 조금 더 정진하자.


가야 할 목표가 정해졌다면 더 이상 앉아서 가는 과정을 생각하지 말자. 그것은 나의 기질과 맞지 않는 것이다. 분명 과정은 엉망진창, 좌충우돌이겠지. 하지만 우물쭈물하다가 어찌 될 것인지 이미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 가슴에 새길 격언은 단 두 가지뿐이다.


“세상을 연민으로 끌어안을 수 없는 사람은 문학의 길에 들어서지 마라.” 박경리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조지 버나드 쇼


나는 문학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글 쓰는 사람이 되려 하기 때문에 저 격언은 항상 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쉽게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럴 때 그 어둠 속에서 길잡이가 되어줄 하나의 불빛이 세상에 대한 연민이라는 대선배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나를 구해줄 수도 있지만 나 자신을 망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저 금언은 내 마음속의 나침반으로 가지고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럼 언젠가 나의 목표에 도착하여 안식할 수 있는 그 순간까지 지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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