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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l 19. 2021

편지

마음씀님께.

마음씀님께.


최근에 자꾸 다른 글들에 영향을 받아 제 글이 본 궤도에서 이탈하여 방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머릿속에서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많은 아이디어들이 한동안 헤매는 사이 다시 제 내면 속으로 가라앉아버렸기 때문에 오늘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오직 쓸려고 했던 것들을 다시 떠올려보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래서 한 편의 글은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곧 마음씀님의 새 글 소식이 올라왔고 그 알림에 끌려 또 다른 세계로 제가 빨려 들어가네요.


저는 기본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는 글들을 다 좋아합니다. 그리고 저하고 결이 같은 생각을 하는 내용에는 솔직히 큰 생각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고 그냥 고개만 끄덕끄덕하다가 ‘좋아요’를 누르는 것도 잊고 그 글을 빠져나와 버리는 경우도 흔하고 그래서 나중에 다시 찾아 가서 ‘좋아요’를 누르고 옵니다. 그런데 뭔가 제 내면을 건드리는 글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은 뭔가를 느꼈다는 것이죠. 그럼 그 감정이 도대체 왜 생겨났는지 곰곰하게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글에 대한 감상이라기보다는 제 스스로에 대한 탐구에 더욱 가까운 활동인 것 같습니다.


마음씀 [오해에 대한 오해]  https://brunch.co.kr/@photothink/136


경쟁에 대한 오해.


첫 부분의 무무의 이야기를 읽고 좀 울컥했습니다. ‘어! 왜 이런 감정이 내 안에서 올라오지?’ 이상했습니다. 그냥 좀 안 좋은 감정이 내 안에 생겨났다가 가라앉았습니다. 그래서 글을 다 읽고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 다시 읽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경쟁이라는 시스템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윤여정 배우님이 오스카 시상식에서 한 말처럼 저는 기본적으로 경쟁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매우 약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말도 더 정확히 하자면 경쟁 시스템 자체는 좋고 나쁘고 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경쟁 시스템을 활용하는 인간들의 마음에 대한 신뢰가 없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대화 상자에서 선배가 하는 말은 본질적으로 사기입니다. 하나의 선 옆에 더 긴 선을 긋는다고 그 선이 본질적으로 더 짧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짧아져 보이는 것이죠. 그러니 선배가 후배에게 하는 말은 이 선이 더 짧아지게 가 아니라 더 짧아지게 보이게 해 봐 여야지 보다 정확한 요구가 되는 것이죠. 처음부터 질문을 오해하도록 유도하고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제가 느끼기에 아주 불쾌한 대화법이라고 느껴졌나 봅니다.


전체적인 대화의 맥락이 무엇인지 무슨 교훈을 주고자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최종 결과 이상으로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을 때 뭔가 결이 튀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있고 제가 그런 예민한 사람이며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남이 알아서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전전긍긍해하는 사람이죠.


그리고 선배의 말은 저의 시각에서는 정말 이상한 말입니다. ‘궁극적인 방법은 네가 상대보다 강해지는 것이지. 상대는 잊어도 돼. 스스로 강해져야 해.’ 이 말은 반드시 전제가 필요한 말입니다. 백 미터 달리기 같은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는 경계가 있는 경기에서는 상대에게 신경을 덜 써도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냥 내가 궁극적으로 더 빠르면 되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우리는 스타터 라인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프로의 세계에서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내 할 일만 하라는 것은 그냥 죽으라는 말이죠.


상대가 있는 경기에서는 나의 정점과 단점, 그리고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이해하고 있어야 전략이 세워집니다. 내가 아무리 혼자 강해져도 경기를 지배하는 룰과 환경이 바뀌는 순간에는 모든 규칙도 달라집니다. 나의 장점과 상대의 장점은 다릅니다. 축구에서 득점력이 강해서 공격력으로 상대를 찍어 누를 수도 있지만, 방어력이 강해서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역습으로 득점을 할 수도 있는 것이죠. 호나우두 같은 스타도 있다면 박지성같이 상대의 장점을 지우는 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냥 강해지면 끝이라고 저렇게 단언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무무라는 책을 읽지 않아서 이 에피소드가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한동안 저 책을 읽을 생각도 없습니다. 이렇게 편견이 잡힌 채로 책을 읽으면 순수하게 내용에 집중할 수 없기에 한참 나중에나 저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죠. 하지만 내가 아는 후배가 자기 후배에게 저렇게 조언을 하면 저는 그 후배의 엉덩이를 걷어차 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유튜브 시대에는 조언과 강연이 넘쳐나죠. 그런데 어떤 강연이 좋은 강연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인문학의 강의는 정보의 99%가 참이라고 할지라도 단 1%의 잘못된 방향성으로 그 강의 전체가 독이 되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99%의 순수한 물과 1%의 맹독이 만나서 그 물 전체가 극독물이 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조언과 강연을 받아들일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는 지극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조언자의 역량을 판단하는 것도 대단한 중요한 일이 되겠죠. 저는 그래서 조언자가 말하는 방향성을 잘 살펴봅니다.


좋은 조언자는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처럼 자신의 경험을 풀어서 이야기하는 경우에도 힌트는 주지만 해석과 해답은 본인이 직접 하지 않고 항상 문제의 당사자가 자신의 답을 찾아낼 것을 요구하죠. 공주와 병사의 이야기가 그랬고, 엘레나에게 둘의 맺어짐을 반대하는 조언을 하면서도 결정은 본인이 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자신은 분명히 쪽지를 전해주겠다고 하면서 조언자를 넘어선 결정자의 위치는 탐하지 않죠.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세상을 해석할 때 그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임을 밝히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사가 자신의 주관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대단히 보편적인 진리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면 저는 그런 이야기는 무조건 경계합니다.


여기 제가 좋아하는 이소룡의 인터뷰가 있습니다. 인터뷰 속에서 이소룡은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할 때 항상 앞에 붙이는 말이 있습니다. To Me라는 말이죠. 나에게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견해도 모든 경우에 참이 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전제가 필요하죠. 그 전제가 저 ‘나에게는…’이라는 말이고 결국 각자의 해석은 알아서 하는 것이지 누구의 것을 그냥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겠죠.


이소룡의 희귀 인터뷰  https://youtu.be/yNRFgoxZibE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받을 때 이야기가 헛도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야기의 전제가 서로 같지 않은 경우가 많죠. 그리고 거기에서 오해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죠. 좌파와 우파가 서로 만나 좋은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이야기는 항상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럼 다시 전제로 가서 각자가 이해하는 좋은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대부분은 전제가 통일되지 않고 막연한 상황에서 그 하위의 이야기가 펼쳐져서 이야기가 중구난방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경쟁의 목적은 참여자 모두의 수준을 향상하기 위함이다.’ 교육자의 경쟁의 목표는 그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경쟁이 이용되는 대부분의 목적은 그냥 객관적으로 사람의 자질을 측정할 수 있는 믿을만한 수단이 없기 때문에 그나마 무언가를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경쟁을 통해서 인간의 특정 능력을 수치화하여 그것으로 ‘공정’이라는 명목 아래 정당하게 사람을 차별하기 위한 수단이죠. 즉 언제나 경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경쟁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목적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언제나 경건하고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경쟁에 대한 오해라고 하셨는데 제가 느끼기에 ‘경쟁’ 자체에 대한 오해는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칼’은 인간에게 참 유용한 도구입니다. 칼로 요리도 하고 사람을 수술도 하며 각종 물건을 아주 쉽게 잘라서 우리가 편리한 대로 사용할 수도 있죠. 그런데 그런 칼이 때론 사람을 해치는 물건으로 사용됩니다. 그럼 그 칼에 다친 사람은 칼 자체를 아주 무서워하게 되죠. 칼만 보면 트라우마가 재발되어 벌벌 떨게 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럴 때 칼에 대한 오해를 지운다고 그 사람의 칼에 대한 트라우마가 해소가 될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경쟁에 대한 오해는 사실 경쟁을 이용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오해입니다.


‘경쟁’이나 ‘칼’ 그 자체에 선함과 악함, 좋고 나쁨은 없습니다. 그것을 이용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여려가지 서로 다른 이해가 있고 그 이해에 대한 여러 오해가 있는 것이겠지요. 전 ‘경쟁’보다는 모든 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려는 마음 자세가 준비되어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때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아마 이건 제 자신이 경쟁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가장 가혹하게 학대한 반성으로 이렇게 반작용도 크게 일어나는 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냥 때늦은 반항심 비슷한 것이겠지요.



오해에 대한 오해.


우리는 흔히 오해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오해는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한동안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처럼 역지사지나 내가 서 있는 방향을 바꾸어 서면 다른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고 내가 낮은 자리로 간다고 할지라도 결국 타인을 느끼는 존재는 나 자신입니다. 나라는 틀을 통해서 남을 이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부분이죠. 그럴 때 내 안에 없는 것은 내가 어디에 있던 감각하지 못하고 단지 이해한다고 착각할 뿐이죠.


제가 까만색을 볼 때 저는 섹시함을 느낍니다. 심플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주 다르게 감각할 수 있죠. 그런데 그 다른 감각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냥 막연히 어떠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대부분의 경우 착각할 뿐이죠. 우리는 개개인이 다른 세상을 본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죠. 그럼 내가 보고 감각하는 세상이 옳은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방향성과 취향일 뿐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겠죠. 그럼 각자의 세상은 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소통은 사실은 모두 오해인 것이죠. 그냥 이해했다고 착각하면서 나와 저 사람은 같은 것을 감각하고 있을 거야라고 안심하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 공포가 되고 또 혐오의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 인간인 것이죠.


그래서 저는 최근에 더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서로 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른 것을 이야기합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큰 코끼리를 만진 부위에 따라 장님들은 모두 다른 말을 합니다. 그럴 때 어느 한 말이 맞고 다른 말이 틀린 것이 아니죠. 장님들이 하는 말은 전체가 아니고 부분일 뿐인 것이죠. 우리는 항상 방향성을 가지고 취향을 가진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이 맞다고 옳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맞고, 옳은 말이 되려면 어느 방향성의 말인지 전제가 미리 통일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이 없이 대부분의 대화가 시작되어 논쟁은 과열되고 나중에는 상대에 대한 미움과 비방만 남게 되는 경우가 요즘은 너무 흔하게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많은 말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판단은 한참 뒤로 미루어야 한다고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에서 감정과 편견이 떨어져 나가고 오직 정보 자체만 남은 많은 조각들을 모아서 그 조각을 한데 이어 전체의 그림을 읽어나가는 연습이 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내가 남을 이해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 되겠지요. 저는 제 자신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를 이해하기 위해 저의 조각들을 모으고 있고 그 과정이 지금의 글쓰기입니다.


저의 글은 많아야 15명 내외의 분들이 읽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읽어주었으면 한다는 욕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무한하지 않죠. 정신이 무한을 상상을 할 수는 있지만 정신 에너지는 결국 뉴런에서 발생하는 명확한 물리 에너지입니다. 10명 내외의 분들이 라이킷을 눌러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힘이 되고 그분들에게 매일 감사합니다. 여기서 두배만 되어도 저의 감사한 마음은 더 쪼개져 덩어리가 작아질 테고, 30개가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알람을 끄고 귀찮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런 것이죠. 환경이 바뀌고 조건이 바뀌면 흔들리고 변화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그런 것이 인간의 내면입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언제나 올곧게 서도록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글을 쓰는 어느 순간 나 자신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릴지도 모르는 것이 현실이죠.


누군가에게  오래간만에 편지를  봅니다. 항상  글을 읽어주시고 저의  구독자인 마음씀님은 저에게 그래서 아주  시간 동안 특별한 분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다른 분에게는 감히 하지 못하는 말도 하고 이런 짓을 하면 미움받는  아닐까 하는 마음에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가슴에만 담아둘 글도 1 구독자님인 마음씀님에게는 하게 되는 것은  쓰는 동안 마음씀님의 응원을 항상 기억하고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한  나름의 노력입니다.


 모든 글은 누구를 공격하기 위한 글이 아니고 그냥 저도 모르는  자신을 탐구하는 과정입니다.  과정에서 만나는 모두를 소중히 하고 싶지만 저는 저의 정신에너지가 유한하여 아주 적은  명의 사람밖에  내면에 들일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   분으로 마음씀 일방적으로 지목한 초보 글쓴이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앞으로도 많은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P.S : 꽤 긴 글이 되었습니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 배려는 진실된 배려가 아니라 오해일 수 있다는 말. 저는 여기에서 우산을 두 개 사는 것이 좋을까 (글을 공개하지 말까?) 아니면 한 개를 사는 것이 맞을까? (공개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글쓰기 전의 저라면 이런 글을 공개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진실된 본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그런 것은 결국 거짓이겠죠?


제가 이런 싸가지를 가지고 있고 속칭 말하는 뽄세가 이러하니 저의 아버지와 항상 대립하고 화목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노력하지만 때론 어떤 분과 치열하고 뜨겁게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어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서로가 다른 의견을 가졌지만 그것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고 더 큰 세계관을 열기 위한 과정임을 서로가 인정하는 가운데 말입니다.


저는 조선의 이야기 중에서 편지로 사단칠정을 논하며 13년간 114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던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만나서 서로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할 이야기가 많을 수 있죠. 저의 부족함을 항상 지적해 주시고 성장할 수 있게 지도해 주시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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