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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Aug 04. 2021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

이현세 화백

내 어릴 적 방황기에 이현세 화백을 빼놓으면 어떤 분기가 일어나게 될까?


시골에서는 어떤 만화를 꾸준히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물섬 등의 만화잡지가 한집에 한두 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래서 나는 만화의 스토리를 알고 싶으면 동네 친구들을 통해 어디에 어떤 만화책이 있다는 것을 수소문하여 그 집에 놀려가거나 아니면 친구에게 빌려다 줄 것을 부탁하여 만화책을 읽고 중간중간에 구멍이 난 스토리는 혼자 내용을 상상하면서 놀곤 했다. 그러다 한 번은 학교 앞에 당구장에 만화책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그걸 보기 위해 몰래 들어갔다가 꼬마가 당구장에 들어왔다고 아저씨한테 크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어쨌든 보물섬을 보던 와중에는 아마 둘리 그리고 주먹대장에 대한 내용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다 한 번은 집 건너 건너에 만화가게가 생겼다. 많지 않은 만화책이었지만 단행본 형식으로 만화책이 구성된 것이 신기했다. 그것은 한국의 만화가 아니고 일본의 만화를 해적판으로 유통한 것이 아닐까 여겨지는데 바벨이란 이름의 캐릭터가 외계 문명의 기술을 이용하는 적과 싸우는 내용을 그린 것이었다. 이야기가 상당히 신선했기 때문에 잠시만 들어가서 본다는 것이 너무 오래 있게 되었고 결국 부모님이 나를 만화가게에서 찾아냈다. 집 가까운데 그런 가게가 생긴 것이 못마땅하신 아버지가 다시는 가지 말라고 정말 따끔하게 나를 혼을 내셨다. 그래서 이후 그 가게에는 다시 가지 못했고 그 만화의 후반부는 끝내 보지 못했다.


그런 기억 때문에 오락실은 다녀도 만화가게는 가지 않던 내가 우연히 다시 만화가게에 들어간 것이 이현세 화백의 까치의 5 계절이라는 만화책 때문이었다. 부천에서 만난 친구 M군의 영향으로 그림 그리고 만화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나는 우연히 만화가게를 지나가다가 밖에 붙인 포스터를 보았는데 그 당시 이현세 화백의 그림체는 다른 것들에 비해 유독 깔끔한 느낌이 들었고 그것 자체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확 솟구쳤다. 그래서 다시 만화가게에 발을 들였고 그 이후로 나는 이현세 화백의 작품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읽고 보았다. 그의 캐릭터들은 반항하고 갈등하는 인물들이고 그 역동성이 막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무언가에 억눌린 듯한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던 나를 크게 자극하고 빨아들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는 작품이었다. 이것은 당시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가로로 긴 브로마이드를 만화가게 밖에 붙여놓고 시선을 자극했는데 그 그림의 역동성이 보는 자체로 어린 마음을 사로잡았다. 돈이 없던 ‘중학교’ 시절에 이것을 보기 위해 나는 학교가 끝나고 집까지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 걸어 다녔다. 그렇게 차비를 꼬박꼬박 모아서 토요일 날이면 만화가게에 가서 그 돈만큼의 만화책을 읽고 좋아했을 만큼 이 작품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고 분명히 울림도 컸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 일본군에 끌려가서 온갖 박해를 받고 탈주를 감행하여 일본군과 대항하는 스토리는 흔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런 스타일의 만화는 거의 독보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오직 이현세 화백의 만화만 보고 다른 만화가의 작품은 아예 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다. 서로 다른 세계관의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인데 그냥 어린맘에는 ‘호불호’의 관점에서 다른 작품들이 질이 떨어진다고 막연하게 느껴버리고 안좋은 편식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나를 스쳐간 또 다른 작품이 허영만 화백의 ‘오! 한강’이었다. 당시에는 이현세 화백의 그림체가 더 힘 있게 느껴지고 스토리도 선이 굵고 남성적이라서 강하게 매혹되어버렸지만 만약 그때 ‘오! 한강’을 먼저 보고 그쪽 이야기에 휩쓸려 갔다면 그럼 어떤 사춘기를 보내게 되었을지 좀 궁금해지는 느낌은 있다. 만약 허영만 화백에 매혹되어 내가 허영만 화백의 이야기를 모두 쫓아갔다면 그랬다면 내 안의 세계관이 조금은 다르게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종종 가져 본다.


그렇게 좋아했던 이현세 화백의 작품을 언제부터 읽지 않게 되었을까? 중학교 시절부터 각종 해적판으로 일본 만화가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현세 화백의 작품을 좋아했었다. 이후 김용의 무협소설과 다른 소설들로 넘어가는 와중에 점점 소원해지고 마침내 어느 지점부터  이상 읽지 않게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작품은 일본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이야기였었다.  작품에서 주인공은 일본 유력가의 양자로 키워지는  같은데 어느시점에 사고로 험지에 고립되어 어떤 특수한 단체에의해 목숨을 구원받고 그것을 인연으로 일반의 의식과는 조금 동떨어진 내용을 교육받고 거기에서 맺어진 동지들과 세상의 전환을 꿈꾸고 혁명을 시도하는 스토리였던  같다. 지금 보면 기본 플롯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배트맨 1편과 유사한 형식을 보이는  같다. 거기에서 주인공의 동료 중에 두형제가 나오고 형제는 어린시절 헤어져 전혀 다른 형태로 성장하게 된다. 형은 동생을 찾아 계속 헤매며 거칠고 충동적이게,  동생은 냉혹한 암살자로 키워지면서 감정이 억제된  조직과 주인공에 맹목적 충성을 하는 캐릭터로 자라나는데  부분에서 이현세 화백의 세계관이 당시의 나의 감정선과 크게 엇갈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 작품에서 인간이 너무 도구처럼 사용되고 사람보다는 목표나 이상의 추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처럼 느껴져서 그 작품을 끝으로 더 이상 이현세 화백의 작품을 보지 않았는데 주인공보다 나는 감정을 잃은 듯한 동생의 모습에 분노하는 형의 캐릭터에 더 감정이 이입되어서 작품을 읽는 내내 좀 내면의 결이 튀는 경험을 하게 되고 이후에 더 이상 이현세 화백의 그림자는 쫓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릴 때 그렇게 좋아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분명히 이것은 좀 극단적인 탐미주의라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이런 것을 일본의 작품들에서 종종 느끼는데 삶을 하나의 미학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같이 사용하는 느낌이며 뜻을 이루기 위해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도 아름답게만 보는 그런 경향성이 나와는 완전 결이 어긋나는 부분이었다. 왠지 그러면 그 끝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여도 허무하게만 느껴져서 나는 그런 결말이 싫었다.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에서 나는 어떤 부분에 그렇게 열광했던 것일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기억나는 장면은 주인공이 물소를 타고 다니면서 밀립을 정처 없이 헤매는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이 작품의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여자 주인공이 동산에 서 있는 장면이 나온 후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나무에 매달린 둥글게 매듭지어진 줄 장면… 이것뿐인데…


대부분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다 지워지지만 그래도 장면, 장면들이 남아 삶의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여 내면화되는데 이현세 화백의 작품에서는 그렇게 내 삶의 부분으로 남아있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참 안타깝고 아쉽운 점이다. 분명히 오래 시간 쫓아가던 삶의 롤모델 같은 분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본 이현세 화백의 말씀 중에 나는 ‘힐링’이 싫다 라는 부분은 이제는 그 분과 나의 거리가 더욱 벌어졌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는 인터뷰였다.


“아프면 저항하는 게 젊음이지, 아프면 치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시대의 저항은 ‘힐링’ 일 수도 있습니다. 기존 체제 속에서 아프니까 반항, 저항하고 혁명을 꿈꾸기 위해 젊은 세대들이 다른 공식의 해법을 찾는 것이 ‘힐링’인 것이죠. 혁명도 저항도 결국 더 좋은 세상에서 공존하기 위한 하나의 몸짓인 것이죠. 저항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힐링’이 맞는 저항 방법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는 젊음이 맞는 방법으로만 저항한 적이 있나요? 밟으면 꿈틀 하는 것은 그냥 반응입니다. 아프니까 저항하는 것도 그냥 반응이죠.


그 저항의 방법을 고민하고 시대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에 맞추어 지난 세대와 다른 해법을 찾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그 말에 저항을 좀 해야겠네요. 그럼에도 화백님의 작품으로 어린 시절 정말 즐거웠고 행복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의 반항심과 뭔가 어긋난 듯한 세상에서 흔들리는 나를 위로해준 그 작품들을 언젠가 다시 읽게 되면 그때는 또 다른 식으로 화백님께 감사를 드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의 추억 속에서 언제나 영웅이었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현역에서 그림으로 승부하는 그 근성에 존경의 마음을 표현해 봅니다. 지난날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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