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와인은 과연 맛있을까
셀럽과 와인을 마신 적이 있다. 그는 와인 라벨을 가린 채로 우리에게 물었다.
"자, 이 와인이 얼마일까요?"
레스토랑의 고급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맛있는 식사, 얼핏 보아도 비싼 액세서리를 걸친 사람들. 그 사이에 낀 사회 초년생인 나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전혀 그러지 않은 척, 가장 먼저 손을 들어서 대답했다.
"한 10만 원?"
당시 내가 상상하는 고급 와인의 가격(타인과 나눠 마실 수 있는)은 그 정도. 그러나 세상에는 비싼 와인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와인을 마셔본 사람도 많았나 보다. 모두 앞다투어 자신이 마셔본 온갖 와인과 다녀온 와이너리를 늘어놓는다. 이 와인의 향, 색깔, 그리고 여운 등을 강조하며 분명 고급 와인이라고 의견을 입을 모았다.
아무리 보편화되었고 접근성이 쉬워졌다고 한들, 와인은 유럽 귀족들이 주로 마시던 술. 마트에서 가볍게 구매해도 1~2만 원가량, 매장에서 마시게 되면 그보다 2~3배 이상의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게다가 와인의 역사만 해도 6천 년 전이라고 하니 그 안에 얽힌 인문, 예술적 지식은 얼마나 방대한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등 각국의 언어로 쓰인 와인 라벨은 읽기조차 어렵다. 와인을 즐긴다는 건 이 모든 장애를 넘어야 하는 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일행들이 부르는 가격이 높아질수록 나는 작아졌다. 와인을 즐길 문화적 소양도 부족하고 여유도 없는 사람인 걸 너무 빨리 고백한 거 같아서. 생각은 꼬리를 물어 어느덧 소득 격차에 따른 기회 불균형, 양극화까지 넘어가고 있었다. 그즈음 와인의 가격도 100만 원을 넘었다. 그제야 그는 가려뒀던 와인을 보여준다.
"이거요, 마트 가면 3만 원도 안 돼요."
'와인 맛도 모르면서 보르도, 부르고뉴 고급 와인만 고집하는 속물들아, 비싸면 맛있는 줄 아냐?'
그가 내뱉은 3만 원에는 저 의미가 함축된 듯했다.
처음부터 이 와인이 스크루 캡으로 따는 와인인 걸 알았다면, 3만 원도 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면, 심플한 라벨을 보았다면 지금과 같은 호평은 나오지 않았을 테다. 우리는 부끄러웠고 동시에 숙연해졌다. 비단 와인 라벨뿐일까. 스펙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뒷배경으로 힘을 보고, 걸치는 것으로 부를 가늠하는 게 요즘 세태인데.
짧은 순간이지만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말을 주옥같이 듣기 위해 최후의 3인으로 남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는 라벨에 현혹되면 진정한 본질을 느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와인은 그저 즐기면 된다는 셀럽의 와인 철학을 곁에서 듣는 것 만으로 비싸다는 5대 샤또를 마신 기분이었다.
그렇게 즐겁게 마시다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일행들이 보이질 않는다.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니, 그 짧은 사이에 옆자리와 싸움이 나서 경찰까지 온 상황이란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우리 쪽 일행들이 술에 취해 시비를 건 것이 확실하다.
향기로운 와인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 사람, 술에 취해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상대방에게 퍼붓고 있었다. 그나마 멀쩡했던 내가 일행들을 대신해서 옆 손님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다가 돌아갔다. 나는 그에게서 어떤 라벨을 보았던 걸까. 갑자기 술이 확 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