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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치열 Oct 28. 2020

프롤로그

2018년 12월, 서울 종로의 ‘서울극장’에서 여성홈리스 이야기를 다룬 다큐영화 ‘그녀들이 있다’를 보았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는 있는 그녀들, 그녀들은 왜 거리로 내몰렸고, 집이 아닌 시설과 쪽방에서 살고 있는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그녀들이 있다’는 종교계노숙인지원민관협력네트워크(이하 종민협)가 만들었다.     


노숙인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는 해마다 동짓날에 ‘거리에서 죽어간 홈리스 추모제’를 연다. 영화에는 거리 노숙을 경험했고 가정폭력을 겪은 분들이 나온다.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가출 후 노숙한 이야기, 폭력 남편을 피해 시설에 입소했던 이야기가 담겼다. 그녀들의 상처 입은 몸과 마음에는 트라우마가 깊었다. 자립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뜻대로 안 됐다.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2009년 1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만 2년 동안 서울역 인근 동자동에 있는   ‘동자동사랑방’이라는 단체에서 주민 공동체 활동을 했다. 홈리스 추모제에는 그때부터 참석했다. 2년 동안의 활동을 접고 나니 추모제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올해는 돌아가신 홈리스의 영정이 몇 개가 더 늘었을까를 생각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있다’를 보면서 동자동사랑방에서 일할 때 만난 한 여성이 떠올랐다. 우리는 그녀를 그녀의 첫째 아이 이름을 따서 “꽃님(가명) 엄마“라고 불렀다. 그녀는 술을 좋아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같이 술을 마셔야 했다. 그러면 더 많은 자신의 속 얘기를 털어놓는다. 덕분에 잘 못 마시던 술이 늘었다. 어느 날, 내게 자신의 머리통을 만져보라며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 하며 그녀의 머리통을 만져보니 뭔가 울퉁불퉁한 감촉이 있었다. 이게 뭐냐고 묻자, ”남편에게 막대기로 맞아서 꿰맨 흉터예요.“라며 오래전 일인 듯 웃으며 말했다. 깜짝 놀랐다. 가정폭력의 산 증인을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네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의 아빠는 각각 달랐다. 그래도 그녀는 아이들을 성심껏 돌봤다. 술을 좋아해서 가끔 아이들을 방치하기도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동자동사랑방 활동을 그만둔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꽃님 엄마’의 부고를 알리는 문자가 왔다. 깜짝 놀랐다. 활발한 성격으로 여전히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가 죽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지난밤에 갑자기 심장마비가 와서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다음날 그녀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장례식장에 갔다. 술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좋아했고 훈수 놓기 좋아했던 그녀였다. 신세한탄을 할 때도 있지만 사무실에 행사가 있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왔다. 나와 의견이 안 맞아서 싸우기도 했다. 동자동에 있을 때 더 잘해 줄걸, 그 좋아하는 술이라도 한 번 더 사줄걸, 하면서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의 영정 앞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그녀들이 있다’에 출연한 여덟 명의 여성들 중에는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여럿 있었다. 가정폭력은 한 가정을 무너트리는 범죄일 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몸과 마음을 망가트린다. 폭력이 발생하면 여성만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니다. 폭행 장면은 고스란히 아이들의 기억에 남는다. 그럼에도 건강하게 성장하는 아이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평생 아픈 기억을 품고 산다. 평탄치 않은 집안 분위기가 싫어서 가출한다. 가출에서 노숙으로 이어질 확률은 높다. 어릴 때 아버지의 폭행을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노숙을 했던 여성도 있었다. 폭력의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여성도 있었다. 그녀들은 지금도 거리, 시설, 응급 잠자리, 여관·여인숙, 고시원, 쪽방 등을 전전하며 살고 있다.     

 

이 여성들은 물리적인 폭력을 경험하기 전부터 신체적·정신적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았다. 공간이 확보되었어도 편안함이나 따뜻함, 소속감을 느끼는 환경은 아니었다. 그래서 거리로 나왔고 시설에 몸을 피했고 쪽방으로 옮겼다. 거리가 되었든 쪽방이 되었든 사회는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안전망이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위험한 요소를 피해 다녔다. 각종 범죄의 두려움 때문에 남성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를 짧게 깎거나 외투를 이용에 최대한 몸을 가리고 다녔다. 누구에게나 허락되어야 할 거리조차도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을 피해 다녔고 홈리스 밀집 지역에서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보이지 않을 뿐인데 사회는 여성홈리스를 없는 듯 취급한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여성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쉼터도 시설도 없었다. 자립을 위한 일자리도 없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이리 저래 외면당하는 여성홈리스의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싶었다. 영화보다는 글이 더 접근성이 높으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들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하니까. 그녀들이 영화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녀들의 상처를 함께 들여다보고 공감하면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제넘게도 나는 비가 올 때 우산을 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사람이고 싶었다. 어쩌면 그 일을 하려고 사회복지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종민협에 여성홈리스를 인터뷰해서 단행본을 만들겠다는 기획안을 냈다. 종민협은 인터뷰를 정리해서 먼저 기사화하면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2019년 4월부터 10월까지 종민협의 협조로 그녀들을 만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들은 영화에 출연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모두 다섯 명을 만났다.      


필자는 경증의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적어야 하는 일에는 치명적인 장애다. 그녀들을 만나 온전히 이야기를 듣고 기록할 수 있을까, 내가 잘 듣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자신의 얘기를 꺼내는데 망설이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그렇지만 곧 ‘휠체어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장애인차별철폐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만한 장애를 가지고 못할게 무엇인가’, ‘전혀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진심을 담아 인터뷰의 취지를 설명하면 그녀들도 마음을 열거야.’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거기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문자통역 사회적 협동조합’ AUD(Auditory Universal Design)가 있지 않은가. 필자는 AUD의 조합원이다. AUD는 내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게 도울 것이다. 인터뷰할 때마다 현장에 문자통역사가 왔다. 인터뷰이의 말을 빠르게 타자로 쳐서 내가 볼 수 있게 했다. 영화에 출연했던 그녀들을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이미 영화에서 그녀들을 봤기 때문에 두 번째 보지만 그녀들은 나를 처음 본다. 어색하고 쑥스러울 것이다. 최대한 그녀들이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영화에는 여덟 명의 여성홈리스가 나온다. 필자는 다섯 명의 당사자를 만났다. 한 명의 아웃리치 상담원, 한 명의 시설 장을 인터뷰했다. 인터뷰가 끝나면 속기록을 정리해서 인터넷 신문에 게재했다. 기사를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녀들을 응원한다고 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써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했다. 힘을 받았다.      

영화는 영상이라 인터뷰이의 얼굴과 목소리가 그대로 노출된다. 인터뷰이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글로 쓰면 그런 부담은 없겠지, 글이니까 영화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할 수 있을 거야, 더 많은 사람에게 여성홈리스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줘야지‘라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단순한 발상이었는지 인터뷰를 하면서 깨달았다. 힘들게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또 한 번 꺼낸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숨기고 싶은 자신만의 속 이야기를 하는 게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예측하지 못했다. 거기다 이야기를 그냥 듣기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인터뷰는 당사자를 만나야만 할 수 있는 작업이다. 될 수 있으면 거리에 있는 여성을 만나고 싶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서울역을 배회했다. 어쩌다 만나는 여성들은 대화를 하기 어려운 상태 거나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그래도 한두 명은 만나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차선을 택했다. 노숙을 하고 쪽방에 사는 분들을 섭외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분들 역시 몸이 아프거나 쪽방을 옮겨 살기에 쉽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거리생활을 하는 분은 약속을 잡기 어려웠다. 거리는 위험한 곳이고 여성들이 쉽게 노숙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당연히 여성들은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다. 노출되지 않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만나기 힘들었다.       


어렵게 섭외한 다섯 명 중 세 분은 임대주택과 쪽방에 살고 있고, 한 분은 시설, 한 분은 거리노숙을 하는 분이다. 노숙생활을 하다가 견디기 힘들면 시설에서 지냈고 시설도 견디기 힘들면 다시 쪽방으로 갔다. 그녀들은 여전히 ‘홈리스’로 살고 있었다.   

   

‘영상’에서 ‘글’로 매체를 바꾸면 그녀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 또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영화든 글이든 시간의 제약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한두 번의 인터뷰로 그녀들의 삶을 공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차라리 거리, 쪽방, 시설에서 그녀들과 한 달이라도 함께 살면서 몸으로 겪는 편이 나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겪으며 처절한 삶의 현장에 서 있어야 했다. 그렇다 해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나는 홈리스가 아니니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집’이 있는 비 홈리스니까.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도 잠재적 홈리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만 보더라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숨은 여성홈리스를 찾아내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녀들이 숨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들추고 싶었다. 피치 못할 선택이어도 그것은 절박한 삶의 방식이므로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했든 그 삶은 존중해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사회는 사각지대에 놓인 그녀들을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다. 노숙은 그 사람이 현제 놓인 상황일 뿐 신분이 아니니까.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니까. 이것은 그들을 보는 시선을 달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숨어있는 여성홈리스를 인터뷰해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확장해 보고 싶었다. 나처럼 영화를 보고 놀란 사람이 있듯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보여주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듯이 우리는 말해야 한다.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그래서 끄집어내기로 했다. 불편한 마음과 불편한 시선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녀들 곁으로 갔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재혼한 아버지가 미워서 20대에 가출한 소라씨는 노숙생활을 거쳐 시설생활을 하다가 쪽방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평탄치 않았던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 게 쉽지 않았음에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인터뷰의 의도인 ‘나, 여기 있어요’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알고 있는 듯했다. 오히려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있고, 동생이 있지만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다. 현재 자신의 옆에 든든한 지원군인 남편이 있어서 인지도 모르지만 내심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큰 것처럼 보였다. 결혼사진을 내밀며 얼굴에 모자이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덧붙인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 글을 읽고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했으면 좋겠어요.”      


엄마의 아바타처럼 산 은영씨는 두 번의 결혼생활을 하면서 거리로 내몰릴 뻔했다. 다행히 거리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고시원과 시설을 전전하면서 홈리스로 살았다. 어렵게 낳은 아들을 이혼하면서 빼앗길 뻔했지만 끝내 그녀의 품으로 안게 된다. 은영씨의 처지를 이해하고 보듬어 준 남편을 만나 임대주택에서 살고 있다. 반 백 살이 넘었어도 옹골차게 삶을 꾸려가는 그녀는 의지만 있으면 어떤 문제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자신보다 힘들게 사는 엄마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인터뷰에 응했음을 밝혔다.    

  

아버지의 폭력이 싫어서 집을 나온 은애씨는 갈 곳이 없어 노숙생활을 이어가다가 시설을 전전하면서 살고 있다. 돈을 벌고 싶고 영어공부를 해서 해외여행을 하는 게 꿈인 은애씨는 발달장애가 있는지 몰랐다. 생활시설 선생님의 도움으로 장애인 등록을 하고 자활근로를 하면서 지내고 있다. 시설에서 지낼 수 있는 기간이 끝나면 그녀는 어디로 갈까? 우리 사회가 그녀와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지 않으면 또다시 거리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돈을 벌어야 했던 미자씨는 결혼생활마저 순탄치 않았다. 갈 곳이 없어 철거하려고 부순 건물에서 두려움에 떨면서 지냈다. 꼬일 대로 꼬인 그녀의 인생은 끝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정폭력이 난무했던 두 번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나서야 온전히 그녀의 생을 찾을 수 있었다는 사연은 맨 정신으로 듣기 힘들었다.      


미혼모 엄마에게서 태어난 수정씨는 자신의 처지를 빨리 인정하고 열심히 살았다. 악착 같이 돈을 모아 사업을 꿈꾸었는데 사기를 당했다. 그때부터 11년째 거리생활을 하고 있다. 임시주거지원을 받아 쪽방에 기거한 적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수정씨는 쪽방 트라우마가 있다. 음악을 좋아해서 쪽방 주민과 홈리스로 구성된 합창단 활동을 하는 게 유일한 낙이다. 노래를 부를 때 그녀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다. 여느 프로 합창단원 저리 가라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공동체 안에서 살고 싶지만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녀가 지역사회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지원주택, 그곳에 입주하는 날이 과연 올까.    

 

퇴근 후, 한달음에 집으로 가 지친 몸을 눕히고 싶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도 지친 몸을 이끌고 그분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쉽게 말을 트지 않지만 단 한 분이라도 그녀가 준 정보에 힘입어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지나가는 시민들이 쌍욕을 퍼부어도 그녀는 거리에 계신 분들 옆에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면서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던 그녀를 만났다.    

       

서정화 소장은 20년째 거리의 여성들을 만나고 있다. 그녀들의 안타까운 사연 하나하나를 듣고, 품고,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 사회가 그녀들을 위한 섬세한 안전망을 갖추고 있지 않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고치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서정화 소장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당사자의 문제 해결도 중요하지만 시설 종사자의 처우도 들여다보고 고민하고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들이 지치면 당사자 문제는 더 요원한 일이 될 수 있으니까. 취약계층을 위해 일하는 많은 전문가들의 노고에 안이한 시선을 거두었으면 한다. 발로 뛰며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수고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서정화 소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 그녀들이 숨어서 살아야만 하는 이유, 홈리스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명제가 있다. ‘문제의 답은 원인에 있다’는 것. 나는 이 명제를 풀기 위해 그녀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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