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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치열 Oct 28. 2020

은애씨의 '꿈'은 세계여행

"아버지의 폭력이 싫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왔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수중에 돈도 없었죠. 돈을 벌기 위해 취직을 했는데 금방 잘렸어요. 제가 산수가 안 되거든요. 계산을 빨리 못 하니까 사장이 싫어했어요."     

더위가 한창인 7월, 서울역에 위치한 사회복지법인 ‘원봉공회’ 사무실에서 김은애씨(가명, 45)를 만났다. 40대 중반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앳돼 보였다. 은애씨는 낯가림도 없는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이런 경우는 인터뷰하기가 가장 수월하다. 자신만의 프라이버시를 남들 앞에서 꺼내기 쉽지 않다고 무턱대고 질문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초등학교 때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데 아무리 해도 머리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8X9=72는 되는데 거기에 더하기나 빼기를 하면 머리가 멍해졌어요. 미치겠더라고요. 저는 지금 여성노숙인 자활쉼터인 열린여성센터에서 하루에 두세 시간만 일하고 있어요. 시간이 좀 있어서 쉼터 근처에 과일가게에서 사람 구한다는 전단을 보고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주인아주머니가 '계산은 잘 할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미안하지만 계산은 좀 못한다'고 했더니 채용이 안 됐어요. 많이 아쉽더라고요. 제가 계산만 할 줄 알았으면....“     


지적장애가 있는 줄 모르고 살았던 은애씨     


은애씨는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자신에게 지적장애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서울에 처음 올라온 건 1996년이다. 21살이던 그녀는 술만 마시면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가 싫어서 무작정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갈 곳이 없었던 그녀는 잘 곳을 찾아 회현역으로 갔다. '여관'이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가자 주인은 은애씨에게 주민등록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자 여관 주인은 은애씨에게 '액자 파는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다음 날부터 회현 상가 지하에서 액자 파는 일을 한 달간 했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은애씨는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을 힘들어했다. 서울에 왔지만 다시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것도 잠시였다. 결국 은애씨는 부산을 떠나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원봉공회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은애씨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시고 오면 엄마를 못살게 굴었어요. 아버지한테 대들지도 못하고 너무 무서웠어요. 중학교 때 아버지가 술을 마신 후 엄마를 또 때리길래 경찰서에 '아버지 좀 잡아가라'고 신고를 했어요. 그런데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남의 집 일에 관여 안 한다면서 그냥 가더라고요. 그때 가슴이 아팠어요. 엄마가 아버지에게 맞고 있는데 남의 집 가정일이라고 가는 걸 보면서 욕이 나올 정도로 화가 났어요.  

    

아버지가 너무 싫어서 집을 나왔어요. 하루는 엄마가 걱정돼 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아버지가 '가시나야, 네 뭐하고 댕기노'하면서 욕을 하더라고요. 저는 아버지 목소리만 들으면 심장이 벌렁벌렁해져요. 그래서 그냥 끊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올해로 5년째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제가 집에 없었어요. 엄마랑 통화하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알고 장례식장에 갔어요. 예전에는 아버지가 무섭고 싫었는데 한 줌의 재로 나온 걸 보니 허무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고. 장례식장에서 친척분들이 그랬어요. '그래도 아버지가 은애 너한테는 잘했다'라고요."     


우리사회는 여전히 가정폭력을 개인의 일로 치부한다. 아무리 아버지라고해도 어머니에게 가하는 폭력은 범죄다. 하지만 경찰은 단순히 개인사라며 ‘남의 집’일로 여긴다. 어쩌면 아버지를 신고한 은애씨를 배은망덕한 딸로 보았을지 모른다. 은애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엄마를 때리는 무서운 사람이었고, 자식들에게 살갑지 않은 무뚝뚝한 아버지였다. 그렇게 폭력적인 아버지를 견디면서 산 엄마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엄마는 어떻게 아버지를 견디고 살았을까.    

  

"엄마의 연세가 지금 65세예요. 20살에 저를 낳았대요. 아버지한테 그렇게 두들겨 맞고 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도망가서 살지 동생 두 명은 왜 낳았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엄마가 '느그들 불쌍해서 어떻게 도망을 가냐'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요. 엄마는 농산물 시장에서 10년, IMF 터진 후 식당에서 7년을 일하셨어요. 엄마가 바빠 끼니를 못 챙겨드렸더니 아버지는 매일 안주도 없이 술만 드시다가 간경화에 걸리셨어요. 엄마는 식당일을 하면서도 요양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루도 안 거르고 했어요. 옆에서 지켜본 요양보호사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정도였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혼자 있기 외롭다며 저보고 집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며칠 못 있고 다시 나왔어요.“     


역마살이 있던 은애씨는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은애씨의 방랑 생활은 전국을 무대로 계속되었다. 하지만 어느 지역에 가든 꼭 일을 했다. 일반적으로 '홈리스' 하면 게으르고 일할 의지가 없고 남에게 무언가 얻으려고만 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은애씨는 달랐다. 일을 하지 않으면 '무섭고 춥고 배고픈' 노숙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초반부터 일을 했어요. 공장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3개월밖에 못하고 잘렸어요. 일터에서 나오면서 '나를 이끌어주고 인도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이 없어서 방랑 생활을 더 오래 한 것 같아요. 34살 때였나? 벼룩 신문을 보고 어느 큰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어요. '아무 일이나 다 할 수 있다' '찬밥 더운밥 안 가리고 일할 수 있다'고 했더니 이력서도 안 써 갔는데 합격했어요. 일을 하다가 오해가 생겨서 두 달 만에 잘렸지만.“     


은애씨는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서울에서 지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춥고 배고픔을 피해 잠시라도 쉴만한 곳으로 가고 싶지만 그런 곳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속터미널에서 노숙을 했다.      

2012년부터 노숙인 복지가 강화된 후로 사람들의 이동이 많은 터미널이나 역사를 돌면서 위기상황에 처한 노숙인을 위한 거리 상담을 한다. 상담원은 은애씨를 발견하고 여성자활쉼터인 '열린여성센터'를 안내했다. 한 시설에서 2년 이상을 지낼 수 없기에 열린여성센터에서 2년을 지낸 후 다른 시설로 옮겨야 했다. 옮긴 시설에서는 2년을 살지 않았는데 리모델링을 한다는 이유로 문들 닫았다. 은애씨는 다른 시설을 찾아야했다. 리모델링에 들어간 시설 관계자는 은애씨에게 서울역에 있는 '노숙인을 위한 다시서기 종합지원센터'를 안내했다. 또다시 시설을 옮긴 은애씨는 시설을 전전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설 말고는 갈 곳이 없었고 시설마저 가지 않으면 다시 거리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서기 센터의 실무자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은애씨에게 ‘홈리스를 위한 성프란시스대학’이 있다면서 그 곳에서 진행하는 인문학 강좌를 들어볼 것을 권했다. 


"처음엔 인문학이 뭔지 몰라 안 하려고 했는데 면접을 보고나서 내가 못 배우고 지식이 없으니까 꼭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결국에는 붙어서 일주일에 세 번씩 강의를 듣고 있어요. 인문학 수업을 듣다 보니까 '옛날에 어떻게 살아왔나' '과거의 좋은 일 안 좋은 일' 등이 생각났어요.“    

 

그녀는 인문학을 듣는 동기들과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눈다. 가끔 카페에 글도 쓴다. 인문학 백일장에 참가해 상도 받았다.      


<마이하우스>   

  

“집이 나에게로 온다. 나에게로 들어온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린다. 내 동생들도. 5식구다. 어릴 때 우리 아버지는 건축 미장 기술자였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부산 낙동강 옆에서 미꾸라지 잡는 데 일등이었다.      

어느 날 부산 낙동강에서 개구리를 잡아서 가지고 오셨다. 개구리를 죽여서 만든 요리인 줄 모르고 잘도 먹었다. 먹고 나서 '아빠, 이게 뭔가요'라고 물으니 개구리였다고 한다. 배탈이 나서 죽는 줄만 알았다. 욱하고 토해낸 개구리가 배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고 식겁했다. 그때 이후로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 잘 안 먹는다. 먹고 나니 몸보신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이후로 내 몸도 건강해졌다. 지금은 그 아버지가 내 곁에 안 계신다. 돌아가신 지가 벌써 5년이 되었다. 아버지,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더 개구리랑 미꾸라지를 푹 끓여주세요.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아버지의 정으로."      


무뚝뚝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였지만 은애씨의 글에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성격이라 떠돌아다니는 게 좋다고 했던 은애씨는 어쩌면 외롭고 힘든 객지 생활에서 마음 붙일 수 있는 곳,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닌 건 아닐까?      


믿었던 사람의 배신배신으로 입은 상처     


"25살에 영등포역 대합실에서 한 남자를 만났어요. 나이는 나보다 어리고 키도 작았어요.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랐어요. 근데 그 사람이 그냥 좋았어요. 어느 날 그 사람이 아는 형한테 여자랑(은애씨) 같이 있다고 전화를 했어요. 그리고 며칠 후 경기도 시흥에 옥탑방을 얻었어요. 보증금은 그 사람 아는 형이 준 것 같아요. 시흥 옥탑방에서 그 남자와 살면서 저는 회사에 다녔어요.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그 남자한테 다 줬어요. 6개월이 지났을 때 볼 장 다 봤다는 듯 떠나버렸어요. 남자도 모르고 세상 물정도 모르고 살다가 그 사람에게 정을 주었는데 배신을 당한 거죠.     


지금은 잊었지만 그때만 해도 상처가 컸어요. 기분도 울적하고 한동안 마음을 못 잡아 (부산)집에 가서 쉬었어요. 어느 날 숙모랑 같이 누워서 얘기하는데 저보고 왜 배가 불렀냐고 하시더라고요. 얼른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임신 6개월이래요. 그 사실을 안 엄마는 아버지가 알면 둘 다 죽는다고 의사한테 울며불며 애를 지워달라고 사정했어요. 의사는 이미 아이의 눈, 코, 입 등이 다 생겼다고 안 된다고 했지만 매달리다시피 해서 결국 지웠어요."    

 

의지할 곳 없던 은애씨는 영등포에서 노숙하던 남자를 만나 6개월간 동거를 했다. 임신한 줄 몰랐고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낙태를 했다. 아버지에게 못 받은 사랑을 받고 싶었고, 외로워서 정을 주었는데 사달이 난 것이다. 어쩌면 그 남자는 처음부터 은애씨를 이용만 하고 책임질 생각이 없었는지 모른다. 후회가 막심했다. 그 당시에 은애씨의 나이 겨우 스물다섯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임신과 낙태를 겪고 몸과 마음이 지칠 만도 했지만 은애씨는 다시 일을 찾아 떠났다. 전라도와 강원도, 제주도로 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물론 한 가지 일을 오래 하지는 못했다.      


노숙만은 하지 않으려고 잠자리가 딸린 식당에서 일했다. 돈을 모아서 방 한 칸이라도 얻고 싶었지만 돈을 규모 있게 관리 하는데는 소질이 없었다. 30대에도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지만 그녀가 번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은 허름한 고시원이 전부였다. 2018년도에는 코레일이 운영하는 노숙인을 위한 자활사업에 참여해 월 60만 원을 받았다. 하지만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고시원 입실료로 월 25만 원을 내고 교통비를 쓰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고시원은 밥과 김치 밖에 김치밖에 주지 않았다. 영양실조가 걸릴 것 같아 두 끼를 사 먹었다. 월급은 금세 바닥이 났다. 은애씨는 다시 '열린여성센터'를 찾았다.     


영어공부하고 세계여행 가는 게 꿈     


"열린여성센터에서 지내면서 하루 두세 시간씩 자활근로를 하고 있어요. 센터에서는 방 하나를 세 명이 써요. 보통 사람들은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편히 쉬잖아요. 그런데 방을 세 명이 같이 쓰니까 코 고는 사람, 술 먹는 사람, TV 보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에요. 편하게 쉴 수가 없어요. 여기는 내년까지만 있을 수 있어요. 여기서 나갈 때 임대주택에 들어가고 싶은데 그게 안 되면 단칸방이라도 구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입에 풀칠하려고 찬밥, 더운밥 안 가리고 일했어요. 쉰 적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도 지금 '집'이 없어요. 여기는 자활 시설이기 때문에 2년 후에는 자립해서 나가야 해요.“     


집을 간절히 원하는 은애씨는 열린여성센터 사회복지사의 권유로 지난 5월 장애 진단 검사를 하고 지적장애 3급 진단을 받았다. 장애인으로 등록이 되면 임대주택 입주 자격의 우선순위가 된다. 계산하는 걸 힘들어 했지만 학창시절에는 유독 영어 과목에 흥미가 있었다. 상업고등학교를 다닐 때 주산 부기 타자 같은 과목은 어려웠지만 나이 많은 선생님이 가르쳐도 영어는 재미있어했다.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키가 작아서 맨 앞에 앉아 있는데 영어 선생님이 제가 듣기평가에서 점수가 제일 잘 나왔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어깨가 으쓱하더라고요. 상업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다른 과목보다 영어 과목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상고를  졸업했어도 대학에 가면 영문학과를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대학교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게 했어요. 진학에 도움 받을 만한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어 결국 못 갔어요. 지금이라도 영어 공부할 기회가 온다면 하고 싶어요. 요즘에는 바리스타에 꽂혀서 바리스타도 배우고 싶어요.“   

  

은애씨의 꿈은 영어를 배워서 세계여행을 하는 것이다. 지적 장애가 있지만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여자가 노숙을 한다는 건 남자보다 힘들어요. 노숙할 때 얼굴이 안 보이게 옷 같은 걸로 꽁꽁 묶고 잤어요. 혹시 남자가 건들까봐 겁이 나서요. 지금까지 오만가지 일을 다 한 이유는 노숙하지 않고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어요. 이제는 저한테 맞고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고 싶어요. 지방에서 일할 때도 정말 일만 했어요. 바로 근처에 있는 유명한 관광지도 못 가봤어요. 생각해보면 그런 게 너무 아쉬워요."    

  

언제부터인지 서울역 광장에서 여성홈리스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남성홈리스보다 많은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성폭력뿐만 아니라 주취 후 시비 걸기, 구타 등의  상황도 종종 발생한다. 여성홈리스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위험을 피해 대형마트의 주차장이나 공중화장실, 그도 아니면 공원의 후미진 구석으로 숨기 때문이다. 여자 화장실은 누구의 간섭이 없이 안전하고 조용하여 여성홈리스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여성 쉼터 실무자들은 "여성이 거리생활을 할 때 주로 화장실을 잠잘 곳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화장실도 그렇게 이상적인 곳은 아니다. 저녁에 지하철이나 건물이 문을 닫는 시간이 되면 건물 안의 관리자가 화장실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체크하고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전철역의 화장실에는 “노숙인 장기간 화장실 이용금지”와 같은 전단지가 붙어 있다(신 흠, 2011). 이 같은 이유 때문에도 여성홈리스는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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