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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치열 Oct 28. 2020

미자씨는 운이 없어서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한 걸까?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이었다. 용산구 동자동 ‘새꿈 어린이 공원’에는 더위를 식히기 위해 나온 주민들이 많았다. 한 평 남짓의 쪽방은 아무리 선풍기를 틀어도 더위가 식지 않는 곳으로 악명이 높다. 공원입구의 허름한 카페에서 이미자씨(가명, 64)를 기다리기를 십 여분이 지났을까.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아담한 키에 수줍은 얼굴을 한 여성이 카페로 들어왔다. 영화에서 본 미자씨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였는데 실물은 그렇지 않았다. 미자씨를 만나기 며질 전, 종민협 간사는 미자씨가 연골 수술을 해서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슬픈 소식을 전했는데 이렇게 나와 주다니, 내심 고마웠다. 미자씨의 표정도 어두워 보이지 않아서 마음을 놓았다.    

  

"아버지가 학교에 보내주지 않아 글을 배우지 못했어요. 흔히 하는 말로 '까막눈'이었어요. 아이 둘을 낳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눈치껏 살았는데 아이들이 학교에 가니까 숙제를 내주잖아요. 아이들 숙제를 하려면 부모가 뭘 알아야 해요. 안 되겠다 싶어서 그때 한글을 배웠어요."  

   

미자씨가 ‘그녀들이 있다’에서 울먹이며 이야기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이야기 할 때, 남편에게 맞는 것도 억울한데 툭하면 시댁식구들까지 집으로 찾아와 때렸다는 이야기를 할 때, 내 편은 어디에 있을까,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하는 원망이 들리는 듯 했다.     

 

미자씨는 8남매 중에 여섯째로 태어났다. 8남매를 모두 학교에 보내기엔 집안 형편이 너무 안 좋았다. 큰오빠와 미자씨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바람을 피우느라 얼마 되지 않았던 논밭마저 다 팔아서 썼다. 아홉 살밖에 안 된 미자씨는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며 돈을 벌었다. 자신처럼 두 동생마저 학교에 다니지 못해서 글을 배우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일 해 동생들의 학비를 벌었다.      


"부모님은 왜 나를 낳아서 이렇게 고생스러운 인생길을 살게 하나 싶었어요. 친구들이 학교에 다닐 때 나는 빨래하고 물 길어오고 아기 키우고 밥하고 그랬어요. 죽으려고 쥐약을 먹었는데 안 죽었어요. 그래서 화약을 먹었어요. 그걸 먹었는데도 안 죽고 입에서 석유 냄새만 나더라고요."


부모님이 있었지만 사랑을 못 받았다. 아홉 살 이후로는 고아처럼 살았다.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 미자씨는 모 심고 밭 매고 나락 베고 산에서 나무하고 쌀 도정공장을 다녔다. 행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학교에 보내지 않은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미자씨네 집 근처 카페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카페에서 이야기 하는 미자씨. 당뇨가 있어 목이 마르다며 아이스 녹차를 시켰다.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는 미자씨를 보며 옆집 아줌마와 얘기 하는 것 같았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미자씨     


미자씨는 현재 서울역 인근 동자동의 반 지하 쪽방에서 재혼한 남편과 살고 있다. 쪽방이 밀집된 그곳에는 대부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나 몸이 아픈 사람들이 산다. 이웃 중에는 앞을 보지 못하고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창수(가명)씨가 있다. 미자씨는 본인이 어렵게 살아왔기 때문인지 힘들게 사는 사람을 외면하지 못했다. 창수씨를 돌보는 요양보호사가 있지만 남자 요양보호사라서 요리를 못했다. 종종 창수씨의 집에 들러 음식을 만들어줬다. 요양보호사가 쉬는 주말에는 청소와 빨래를 해주었다. 벌써 5년째다. 


"이 동네에 사는 아줌마들이 저보고 그래요. 미자씨는 왜 눈도 안 보이고 냄새 나는 그 집에 가서 일을 하냐고요. 그래서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벌 받는다고 했어요. 어떤 사람은 제가 돈 받고 그 일을 하는지 알아요. 돈은 전혀 받지 않아요. 저는 기초생활수급을 받고 있어요. 어렵게 사는 사람의 심정은 겪어본 사람이 잘 안다고  저는 그냥 순수하게 봉사하는 것뿐이에요. 친형제들과도 잘 만나지 않아요. 하지만 창수씨 에게는 누나 동생 하자고 했어요. 정이 들어서 뭐라도 있으면 나눠 먹고 그래요."     


넉넉지 않은 형편에 남을 돌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남겨 준 재산을 전부 썼고 미자씨 형제는 가난하게 살았다. 자신이 일하지 않으면 동생들은 물론 부모님조차 먹고살기 힘들 정도였다. 남의 집 식모살이를 가장 오래 했다. 성년이 돼서도 글씨를 모르니까 회사 같은 곳은 엄두도 못 내고 다방이나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미자씨는 결혼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방의 주방에서 서른 살까지 일하며 커피를 타고 차 만드는 법을 배웠다. 사장이 좋게 보았는지 주방장으로 일하게 됐다. 주방장으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던 어느 해, 미자씨가 일하는 다방에 한 남자가 손님으로 왔다. 미자씨를 몇 번 보더니 결혼을 하자고 했다. 미자씨는 애초부터 결혼할 마음이 그의 청을 단박에 거절했다. 남자는 술을 좋아했다. 술 마시는 모습을 본 미자씨는 더욱더 그 남자가 미덥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미자씨가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며 1년을 매달렸다. 망설이던 그때 미자씨의 어머니가 "너도 이제 나이가 많고 건강도 좋지 않으니 웬만하면 그냥 결혼해"라고 했다. 미자씨는 고민 끝에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나이 31살이었다.  

    

남편은 실리콘 기술자였다. 수입이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생활비는 꼬박꼬박 주었다. 사람은 착했으나 술만 마시면 미자씨를 때렸다. 견디기 힘들었지만 연년생으로 낳은 아이들이 대학에 갈 때까지만 참자면서 버텼다. 아이들이 어릴 때 이혼하면 돈 버느라 바빠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까봐서다.      


"술을 안 마시는 날은 괜찮았어요. 그런데 술만 마시면 화를 내고 내가 조금만 바가지를 긁으면 시댁 식구에게 일러바쳤어요. 마마보이 처럼요. 시부모님은 남편의 말만 믿고 저를 구박했어요. 심지어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6대1로 저를 때렸어요. 남편,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 시동생, 동서 6명이서요. 한 달에 대여섯 번은 서울에 올라와서 때렸어요. 남편은 술 먹고 폭력을 쓰지 않으면 새벽 3시까지 잠을 못 자게 괴롭혔어요. 아이들까지 못 자게하고. 힘들고 괴로웠지만 아이들이 어려서 참았어요. 아이들이 크니까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이제는 아버지랑 이혼하라'고요. 그래서 애 아빠 몰래 법률사무소에 의뢰해서 이혼했어요.      


이혼 후, 대구로 발령 난 딸은 연락이 없고 아들과 둘이 살았어요.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나오다 보니 박스 줍는 일을 하면서 근근이 살았어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도와주던 아들은 '이대로 못 살겠다'며 친구 집으로 가겠다고 하고 나갔어요. 그때부터 소식이 끊겼어요. 그 때부터 딸과 아들 모두 연락을 안 하고 살아요."

 

풀리지 않는 미자씨의 인생     


악몽 같던 기억을 떠 올리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 일을 다시 묻는 것도 미안했다. 그래도 자신의 아픈 상처를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들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편인 것처럼 든든할 때가 있으니까. 

       

이혼을 하고 나면 마음고생을 덜하면서 아이들과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떠났다. 아이들도 엄마를 두고 떠나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으리라.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 아이들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빨리 오지 않았다.      


“31살에 결혼해서 아이들을 연년생으로 낳고 59살에 이혼했으니까 거의 30년을 산  거죠.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정말 까마득해요. 아이들마저 떠나니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시댁 식구들의 지나친 간섭과 남편의 폭력 때문에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 우울증이 왔어요. 우울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어요.     

 

이혼 하고나서 돈이 없으니까 월세로 살았어요. 근데 몸이 아파서 일을 못 했어요.  병원에 다니다가 보증금을 다 까먹었어요. 살림도 다 버리고 빈 몸으로 나왔어요. 서대문 영천시장 근처의 폐 고시원에서 1년 6개월 정도 몸만 숨기고 살았어요. 노숙을 한 거나 마찬가지죠. 전기와 수도가 다 끊어진 곳이었어요. 밥은 서울역 근처의 무료급식소에서 하루 한 끼를 먹었어요. 잘 씻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니까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죠.“  

   

가정폭력을 피해 이혼을 했지만 삶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몸이 아파 보증금을 다 까먹고 나니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아니, 갈 수 있는 곳을 알지 못했다. 미자씨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니까. 결혼도 처음, 이혼도 처음, 길거리에 나 앉기도 처음이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어디에 어떤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영천시장 근처 공원에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저를 알아보고 '어쩌다 이렇게 됐냐'면서 놀라는 거예요. 자세히 보니 남편의 수입이 일정치 않았을 때 일했던 식당의 단골인 거예요. 그 손님이 저를 보고 안 됐다고 여관을 하나 잡아 깨끗이 씻겨서 노숙인을 위한 자선병원에 데리고 갔어요.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기초생활수급도 받을 수 있게 해주고 저를 살려 놓았죠.    

 

얼마 후 병원이 자기 집에서 가까우니까 노숙하지 말고 자기 집에서 다니라고 해요. 마음이 동하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따라갔어요. 이후 불쌍한 건지 정이든 건지 저보고 같이 살자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거절했는데 자꾸 권하길래 뿌리치지 못했어요. 결국 그 사람과 재혼을 한 거죠."     


남편의 알코올중독 때문에 폭력을 당했다는 사례는 종종 들어보았다. 하지만 시댁 식구들까지 폭력을 가했다는 말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자기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법인데 아이들까지 낳고 사는 부부의 싸움에 끼어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일까.  

    

미자씨는 다시는 결혼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에 재혼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두 번째 결혼은 노숙으로 다 죽어가는 미자씨를 살린 사람이기에 믿을 만 했다. 그 믿음은 잠시였다. 두 번째 남편 역시 술을 좋아했다. 술을 마시면 폭력은 물론 꼭 사고를 쳤다. 남의 싸움에 끼어서 영업 방해로 벌금을 내야 했고, 술을 마시고 미용실에 갔다가 (술을 먹었기 때문에)당장 오늘 머리를 자를 수 없다는 사장의 말에 화가 나서 폭력을 썼다. 경찰 조사를 받았다. 사장은 피해가 만만찮다며 보상을 요구했다. 보상해 줄 돈이 없어서 징역을 살았다.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고 벌금이 자꾸 들어갔다. 미자씨는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저축을 해서 넓은 집으로 이사도 하고 아이들을 만나면 얼마라도 보태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은 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툭하면 사고를 치는 남편 때문에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더는 함께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혼을 하기로 결심 했다.      


"몇 달 전에 무릎관절 수술을 했어요. 왼쪽에 이어서 오른쪽 무릎을 수술했는데 수술하고 입원해 있는 동안 남편이 또 사고를 친 거예요. 술 먹고 동네 사람하고 싸움이 붙었어요. 경찰이 왔는데 남편이 가해자라고 했대요. 벌금이 또 얼마가 나올지 몰라요. 정말 힘들어요."     


1년 6개월간 노숙하며 살던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지만 이제는 원수보다 못한 사람이다. 미자씨의 인생은 왜 이렇게 풀리지 않는 걸까. 그래도 한 번쯤 행복했던 순간은 있지 않았을까. 그 때가 언제냐고 묻자, 미자씨가 말했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한 채 살다가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간 해, 1995년도죠. 제 나이 서른아홉에 한글을 배웠어요. 아이들 보기 창피하고 아이들 숙제를 같이하기 위해서요. 명절에 시댁 식구들이 모이면 노래방에 갔어요. 신나는 음악이 나오고 가사가 나오니까 가사를 보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잖아요. 글을 읽을 줄 모르니 따라 부를 수가 없는 거예요. 창피한 것은 그 다음문제고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이제는 노래방에 가서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 있어요. 얼마나 기쁘고 신이 났는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죠. 또 한 가지는 은행에 가서 송금할 때예요. 한글을 몰랐을 때는 청원 경찰에게 대신 써달라고 했어요.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물론 액수를 잘못 쓸까봐 손이 덜덜 떨리기도 하지만 내 손으로 금액을 쓰고 돈을 보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인생은 행복한 시간보다 고단한 시간이 더 많다. 그렇다고 불행이 반복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미자씨의 인생은 걸어도 걸어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기엔 답답한 구석이 많았다. 아버지의 무책임함, 남편의 알코올 중독과 폭력, 시댁 식구의 횡포,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한 이혼, 노숙, 두 번째 남편의 알코올 중독, 폭력. 이 모든 것을 미자씨 혼자 힘으로 견뎠고 사회는 방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자씨는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혜량(惠諒)을 가졌다.     

  

"저는 크게 소원이 없어요.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관심 갖고 사는 것, 그게 제가 바라는 거예요. 내 입에 밥 들어가는 것보다 남의 입에 따뜻한 국하고 밥 들어가는 게 더 좋아요.“     


나는 미자씨가 당한 아픔에 첫 번째로 놀랐고, 이와 같은 말을 해서 또 놀랐다. 놀라움 이라기보다는 ‘감동’이라고 해야 어울리겠다.     


이제는 다 내려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살고 싶다는 그녀, 아버지의 폭력으로 주눅 들어 살던 엄마를 보며 컸던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그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그녀. 그렇지만 여전히 따뜻한 가슴으로 나보다 힘든 사람을 품는다. 존경스럽다. 남은 그녀의 삶은 뒤늦게 글을 깨우치고 세상을 다 가진 듯했던 그런 시간으로 채워지면 좋겠다.     

 

누구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를 받는다. 미자씨는 영화에서 이야기 할 때 보다 훨씬 편안한 모습으로 자신의 굴곡진 삶을 들여다보고 다시 꺼냈다. 카메라가 지켜본다는 부담이 없었기에 그랬을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빠트린 게 있다는 듯 말했다.   

  

"제가 사람을 만나면 쑥스럽고 조심스러워서 이름을 잘 안 물어보거든요. 좀 웃기는 얘기지만 첫 번째 남편과 두 번째 남편이 같은 성씨예요. 그래서 똑같이 저를 힘들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앞으로는 사람을 만나면 꼭 성과 이름을 물어봐야겠어요. 그렇지 않았다가 또 변을 당하면 어떡해요?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해요.“     


인터뷰 말미에 미자씨는 두 번째 남편과 이혼을 준비하고 있고 10월에 확정 받는다고 했다. 확정일 즈음 연락했더니 이혼이 확정 되었고 남편은 짐 싸서 나갔다고 한다. 미자씨는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됐다. 그 시간은 홀로 노숙을 할 때와는 다른 미지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만의 시간에 갇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행복한 시간 말이다. 이혼하고 나면 노래방에 같이 가자고 했던 약속이 떠올라 11월 말, 종민협 간사와 함께 미자씨를 만나러 갔다. 이혼 전에는 남편이 항상 집에 있어서 오라고하지 못 했는데 이제는 미자씨 혼자 있으니 집으로 와도 된다고 했다. 골목을 돌고 돌아 자리 잡은 미자씨네 집, 그곳은 서울역의 번화한 불빛과는 너무도 대조가 되는 집이었다. 계단을 한참 내려가야 출입문이 나오는 집은 마치 ’토굴‘을 연상케 했다.

       

방에 앉자마자 짧게 근황을 말했다.      


“혼자 있으니까 편해요. 전에는 남편이 술 마실 때면 안주도 만들어야 하고 밥 때 되면 밥을 차려줘야 했거든요. 무엇보다 술 먹고 때리는 사람이 없으니까 살 것 같아요. 예전부터 있던 우울증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약을 먹으면 낮에 졸린데 낮에 자면 밥에 잠을 못 자니까 되도록 안 자려고 해요. 집 근처 산책도 하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가끔 봉사도 하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집 근처의 식당에 갔다. 소머리국밥을 시키고 남은 이야기를 마저 했다. 8월에 봤을 때 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연말도 다가오니 송년회도 할 겸 식사 후 노래방에 가자고 했다.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예요. 다음에 만나면 꼭 같이 가요.” 미자씨는 감기기운이 있는지 노래방은 다음에 가자며 화장실에 다녀온다면서 일어났다. 자리를 정리하고 밥 값 계산을 하려고 하자, 식당주인은 “(미자씨를 가리키며)저 분이 계산 했습니다”라고 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미자씨의 이야기를 인터넷 신문에 게재했을 때다.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약소하지만 미자씨를 후원하고 싶다. 미자씨의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는 내용의 메일이 한 통 왔다. 생각지도 않은 독자의 반응에 가슴이 뛰었다. 종민협 간사에게 계좌번호를 물어 미자씨에게 알려줬다. 후원을 받은 미자씨는 쑥스러워하며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나 역시 뿌듯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는 정말 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그녀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며 겁을 먹었고 두렵기도 했는데 ”좋은 글 써줘서 고맙다“는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내가 하지 않으면 그녀들은 언제까지나 숨어서 지낼지도 모른다’는 오지랖을 부리며 계속 쓰기로 했다. 다음 인터뷰이를 만나는데 힘이 실렸다.       


토굴을 연상케 하는 미자씨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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