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서울역 인근의 원봉공회 사무실에서 이수정(가명, 59)씨를 드디어 만났다. 수정씨는 필자가 아웃리치 활동을 하면서 얼굴을 익혔던 분이다. 하지만 수정씨는 일정한 거처가 없기에 언제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수중에는 핸드폰도 없다. 방을 구하는 일로 종민협 간사와 가끔 연락이 닿을 뿐 이었다.
2017년에 필자가 아웃리치 활동을 할 때는 선뜻 그녀에게 다가설 엄두를 못 냈다. 섣불리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가 자존심이라도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녀는 강해 보였고 거리 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IMF가 터졌을 때 집에서 뉴스를 보는데 노숙인들이 나오더라고요. '인생을 어떻게 살았길래 노숙자가 된 거야? 저 사람들 바보 아니야? 왜 노숙을 해?'하면서 비웃고 혐오감도 있었어요. 그때 그 장면이 생생해요. 그런데 3년 후 사기를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자 십 년 후에는 제가 노숙을 하고 있어요. 노숙하면서 깨달았어요. 그 사람들을 비웃었던 내가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인터뷰가 처음은 아닌 듯, 당부의 말도 잊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이야기하는 동안에 될 수 있으면 질문을 하지 말고 제 이야기에 집중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궁금한 것이 있어도 조금 참고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맥락이 잡힐 거예요. 정말 꺼내기 힘든 이야기이기 때문에 흐름이 끊기면 다시 감정을 추스르고 말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그래요. 이해해 주기를 바라요.
2000년, 그러니까 제가 마흔 살이었을 때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세상을 어렵게 보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재미있게 살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기를 당했어요. 그전까지는 보험회사 대리점 운영하는 일을 했어요. 2~3년 열심히 해서 돈을 좀 모았어요. 모은 돈으로 조그마한 카페를 차리려고 방 딸린 가게를 계약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계약금은 받아 갔는데 가게가 없는 거예요. 사기였어요. 소송하려고 했더니 사람을 시켜서 저를 가두었어요.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끔찍한 일을 당했어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당하면서 어떻게 고발을 안 했어'라고 물을 수 있어요. 근데 당해보니 고발을 할 수가 없었어요. 목숨이 왔다 갔다 했으니까요. 몇 날 며칠 고문당하고 깨어났어요. 악몽도 그런 악몽이 없어요. 자세한 건 지금도 기억이 안 나요. 충격이 커서. 살아있는 게 기적 같아요."
거리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고 자존심도 상당히 강할 것 같은 그녀가 자신이 겪었던 끔찍한 이야기를 하면서 굳은 표정이 되었다. 건드리면 툭하고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질 것 같았다. 재미있고 유쾌한 얘기가 아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말문을 열자 거침없이 지난날의 악몽을 쏟아냈다. 마치 숨 막히는 액션 장면을 보는 것처럼 긴장되는 순간도 있었다. 수정씨는 울음을 터트렸다.
"정말 악몽을 꾸는 것 같았어요. 며칠 동안 폭행을 당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서 경찰에 신고하고 병원에 실려 갔어요. 처음에는 국립의료원에서 치료하다가 서울의료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았어요. 의사들이 '가망 없다'는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절망스럽고 무서웠어요. 그런데 서울의료원의 의사가 저를 살렸어요. 두어 달 입원해 치료를 받았고 몸이 회복되었어요.
그리고 간 곳이 쉼터였어요. 쉼터에 갔는데 조직의 명령과 규율이 엄격했어요. 복종하지 않으면 내쫓다시피 했어요. 스파르타식 같은 구조에 몸서리쳤어요. 몸이 아파서 들어갔는데도 일을 해야만 했어요. 결국 1년 반 만에 쉼터에서 나왔어요. 쉼터에 있다가 나오면 복지서비스가 있을 줄 알았어요. 동사무소에 가서 물어봤더니 아무것도 없대요. 그냥 병원이나 왔다 갔다 하래요. 그래서 노숙을 하게 된 거죠. 쉼터를 나와 한참 걷다 보니 재래시장이 보였어요. 시장에 가니까 썩어서 버린 과일이 있더라고요. 그거 주워서 먹고 어묵 장사하는 할머니한테 무랑 멸치 우려낸 찌꺼기 얻어먹고 그랬어요. 그러다 보니 심신이 다 망가졌어요. 노숙하는 사람은 얼굴색과 피부색이 달라요. 쩔어보인다고 해야 할까요? 피부병도 생기고. 누가 저에게 밥을 사준다고 해서 식당에 같이 가면 식당 주인이 들여보내 주지 않아요.
그런 경험을 자꾸 하다 보니까 상처도 받고 오기도 생겨 성격이 점점 거칠어져요. 한도 많아지고 인간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많이 보게 되고. 노숙을 안 해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죠. '왜 저 사람은 저기에 쓰러져서 잠만 자는 거야'라고 하면서 수군거리고. 미쳐서 그런지 알 거예요.“
사기를 당해 온갖 고초를 겪고 병원 생활 후 시설에 들어갔다. 시설의 엄격한 규칙이 싫어서 나왔다. 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거리 생활이 올해로 벌써 10년째다.
"노숙 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어요. 지금은 어떤 '늪'에 빠져 사는 것 같아요. 몇 시에 어디서 아침을 주고 점심을 주고 저녁은 어디에서 준다는 게 다 입력이 되어있죠. 반복된 패턴으로 살다 보니까 길들여질 수밖에 없어요. 정해진 시간에 밥 나오는 장소에 가지 않으면 못 먹기 일쑤죠.
오후에 배고픔을 못 견디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어디 찾아가서 먹고. 그것도 안 되면 컵라면으로 때워요. 컵라면이 가성비가 좋잖아요 (웃음). 그래서 그런지 살이 많이 쪘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살도 찌고 아픈 데가 없는 것 같지만 속은 다 망가졌어요.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다리도 아프고 당뇨도 있고. 그렇지만 약 안 먹고 버티려고 해요."
어쩔 수 없이 노숙의 길로 접어든 수정씨는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늪'에 빠진 것 같다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노숙 생활은 그만하고 싶다고 그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잠잘 곳이 없어 시설에 들어가 1~2년 보내고, 시설에서 틈틈이 일해 받은 돈은 자립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노숙할 수밖에 없는 구조, 그 구조를 바꾸고 싶어서 메시지를 보냈지만 사회는 뚜렷한 답을 주지 않았다.
이수정씨는 쪽방 주민과 노숙인들로 구성된 '채움 합창단' 단원으로 7년째 활동하고 있다. 노숙한 지 3년째 되었을 때 서울역 광장에서 서울 꽃동네 수녀님을 만났다. 당시 수정씨는 버려진 강아지를 키우면서 노숙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인상 깊게 본 수녀님은 강아지를 안고 노래를 불러달라면서 수정씨에게 합창단 활동을 제안했다. 강아지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것만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강아지 이름은 '사랑이'었다.
"'사랑이'를 제 목숨처럼 사랑했어요. 사랑이가 있어서 힘든 노숙 생활을 견딜 때도 많았죠. 나는 못 먹어도 사랑이는 안 굶기고 꼭 먹였어요. 그런 사랑이가 누가 밟았는지 임시주거지원을 받아 살던 집에서 죽었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말도 못해요. 그 아이를 잃고 많이 울었어요. 오랫동안 힘들었고요."
서울역 주변에서 노숙을 오래 한 수정씨는 ‘사랑이 엄마’로 유명 했다. 자신보다 더 아끼고 사랑했던 반려견이 죽었을 때의 슬픔, 그 슬픔의 깊이가 어느 정도 인지 나는 잘 모른다. 반려견을 키워보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나와 나의 분신인 생물체와 단 둘이서 지내 본 경험이 없어서다. 얼마나 의지하며 살았을까. 마음 놓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수정씨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가혹했다. 털고 일어나지 않으면 본인도 언제 어디서 ‘죽임’을 당할지 모르니까.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사랑이를 잊어야 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었어요. 노래뿐만 아니라 달리기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어요. 성적표에 '팔방미인'이라고 쓰여 있던 게 기억나요. 통지표를 받아서 할머니께 보여드리니까 할머니가 통곡하시는 거예요. 저는 친엄마가 없거든요. 엄마 젖은커녕 분유도 못 먹고 컸어요. 저희 엄마는 미혼모였어요. 제가 백일도 안 되었을 때 먼 친척 할머니한테 맡겼대요. 그 시절에는 거의 엄마 젖을 먹고 크지만 엄마가 없으니까 젖을 못 먹었죠. 할머니도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분유를 살 돈이 없었나 봐요. 지금도 기억이 나요. 제가 배고파서 우니까 할머니가 밥을 꼭꼭 씹어서 제 입에 넣어주시던 게.”
자신이 미혼모의 딸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의 마음이 어땠을까. 거기다 엄마는 자신을 버렸다. 세상천지에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고아’로 산다는 것은 얼마만큼의 ‘외로움’과 ‘슬픔’을 견뎌야하는 일인지 알 길이 없다. 공감은 나도 그런 상황에 놓인 적이 있거나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클 때 생기는 거니까.
"할머니랑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어요. 중학교, 고등학교는 하숙을 했어요. 할머니가 힘이 없어서 밥해주기 힘드니까 하숙을 시킨 것 같아요. 하숙비는 엄마 친구분이 냈고요. 아마도 엄마가 하숙비를 몰래 주셨을 거예요. '미혼모'라는 단어는 커서 알았고, 버려졌다는 건 어렸을 때 눈치로 알았어요. '다른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다 있는데 나는 왜 엄마 아빠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알게 된 거죠. 갑자기 알았으면 충격이 컸을 텐데 일찍부터 체감을 해서인지 담담하게 받아들였어요. 대신 친구들한테는 자존심이 있으니까 부모님 얘기를 꺼내지 못하게 했어요."
진즉에 그녀가 거리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합창 단원이라는 것도 알았다. 연습 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공연도 보았다. 10년 동안이나 노숙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현재는 부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단 둘이 얘기를 나눠본 적은 처음이기에 이렇게 가슴 아픈 사연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했어요.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벌고 시간을 쪼개 부동산 중개소에서 집을 소개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어요. 그 당시에 모은 돈이 8천만 원 정도 됐어요. 그걸로 내 가게를 하나 차리려고 했는데 사기를 당한 거죠."
수정씨는 25살에 한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남자였다. 서로 외로우니 의지하면서 살았는데 아이 엄마가 자주 찾아왔다. 수정씨는 본인이 부모 없이 컸기 때문에 아이를 위해 남자와 헤어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년의 동거 생활을 정리했다.
그 후, 일밖에 모르고 살았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 빨리 나의 가게를 차리고 싶었다. 그 꿈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바람에 노숙의 길로 들어섰다. 노숙을 그만하고 싶어서 '쪽방'에 살기도 했지만 쪽방 트라우마가 너무 심했다. 차라리 노숙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거리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노숙생활은 늪과 같아요. 혼자 빠져나오기 힘들어요. 노숙을 하면 자학도 많이 하고(울음). 자신을 괴롭히는 잠재의식 때문에 더 깊숙이 노숙의 길로 빠져들어요. 쪽방은 사람 하나 누우면 꽉 차는 공간이에요. 똥간보다 더 더러운 냄새가 나고, 밖에서는 아무 때나 문 열어젖히고, 화장실도 공동으로 쓰니까 마음대로 못 가고, 월세는 비싸고. 돈이 없으니까 쪽방에 살 수밖에 없고, 선택의 폭이 좁으니까 서러웠어요. 저는 집에 대한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요. 제가 데리고 있던 유기견도 누가 밟아서 죽고. 피곤해서 자고 있는데 누가 문을 따고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
내 한 몸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행복하다고 해야 하나. 노숙인 복지정책에는 자립, 자활의지가 있는 노숙인에게 임시주거지원을 해주도록 돼있다. 그러나, 서비스를 받기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 임시주거지원을 받는 2~3개월 동안 반드시 자립하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아웃리치 활동을 할 때도 거리에 계신 분들에게 이 제도를 설명했다. 거리에 있는 것 보다는 낫지 않냐고 하면서. 속으로는 ‘그래봤자 지원이 종료되는 2~3개월 후에는 다시 거리로 나올 텐데 뭐’라고 중얼거렸다. 도대체 2~3개월 동안 한 평 남짓의 방에서 무슨 일을 찾고 어떻게 자립을 하라는 말인가. 보통 사람들도 직장을 구하려면 최소한 6개월에서 1년은 걸린다. 그렇게 해도 원하는 직장에 취업을 못 하는 사람이 많다. 요즘같이 실업난이 극심할 때는 더 힘들다. 운 좋게 일을 구한다 해도 그 일은 좋은 일자리가 아니다. 일을 통해 충분히 자립의 기반을 다질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지원기간이고, 자립을 보장할 수 있는 일자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대부분 계약직이거나 특히 여성에게 알맞은 일자리는 더 드물다. 오랜 시간 거리생활을 하던 분들에게 3개월의 임시주거지원은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에도 짧은 기간이다. 이 서비스를 ‘탈 노숙’을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임시주거지원을 받아도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질환을 가진 당사자에게 전문가가 개입하지 않았을 때다. 질환을 치료 할 수 있도록 돕고 기초생활보장 수급 지원도 해주고 필요할 때 상담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거유지율은 높다. 이때 임시주거지원 서비스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서울시에서 임시주거지원을 두 달 정도 해줘요. 지원해 주는 돈에 맞춰서 집을 구해야 해요. 집이 아니라, ‘방’을 구하는거죠. 그런데 그 돈으로는 정말 제대로 된 ‘방’이 없어요. 지금 내 처지가 이러니까 감사히 생각하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저는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아무 곳에나 못 들어가겠더라고요. 나이가 있으니 마음은 급한데 겁이 나서 결정을 못하고 있어요. 지금도 계속 방을 보러 다녀요.”
임시주거지원 서비스에 대해 수정씨가 한 말 중, “‘집’이 아니라 ‘방’을 구하러 다닌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수정씨는 항상 배낭을 메고 다닌다. 양손에는 여러 개의 비닐 가방이 들려 있다. 노숙을 하니까 짐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다. 그 무거운 짐을 메고 양손에는 비닐 가방을 들고 방을 구하러 다닌다. 마음에 드는 방은 이미 포기했다. 그저 안전하고 쾌적하게 잠을 잘 수 있는 방을 찾고 있을 뿐이다. 10년 동안 노숙 생활을 하며 이러저러한 복지 서비스를 받았고 앞으로도 그 서비스를 받아야만 살 수 있다. 일하고 싶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납치당했을 때 폭행으로 다리를 다쳐서 잘 걷지 못한다. 장애진단을 받아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로 선정되면 좋은데 그것도 여의치 않다. 수정씨처럼 '탈 노숙' 욕구가 있는 사람에게 현재의 복지 서비스는 만족스럽지 않다.
"노숙하는 사람들은 뭘 움켜쥐고 끌고 다니는 습관이 있어요. 이걸 '저장 강박증'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보상심리예요. 망한 인생이지만 짐을 끌고 다니면서 어떻게든 보상받고 싶어 하는 거죠. 욕심을 부리면 복지시설이나 기관에서 일하는 분들이 더 친절했으면 좋겠어요. 서비스를 주더라도 이용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주었으면 좋겠어요. 노숙인 시설이면 노숙인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실무자들이 일 처리하기 쉽게 시스템을 만들어요. 불편한 점을 항의하면 무시하거나 오히려 불이익을 받아요. 규칙, 규율 만들 때 당사자들도 포함해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실무자들 위주로 그것들을 정하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소외감을 많이 느껴요. 저도 하루빨리 노숙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노숙을 끝내고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서 텃밭 있는 집에 살고 싶어요. 그게 저의 소박한 바람이에요.“
수정씨의 바람은 이루어질까? 임시주거지원을 받아 올 겨울 추위를 피하면 다음해 겨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집’을 구할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출생의 비밀, 어린 시절의 애환, 고아처럼 혼자 살면서 겪은 모진 풍파들 등 이런 얘기는 정말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예요.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한테 신앙고백은 했지만 사람에게 이렇게 다 털어놓는 건 처음이에요. 내가 죄짓고 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니까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서 쉽게 꺼내지 못하는 거예요. 얘기하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꺼내기 싫은 얘기, 즐겁지 않은 얘기, 살을 에는 아픔을 견디며 외롭게 살아온 얘기를 쏟아낸 수정씨는 홀가분해 보이면서도 무척 피곤해 보였다. 다른 사람의 아픈 이야기를 듣는 나도 힘들었다. 하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그녀가 겪은 아픔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까. 제때 끼니를 해결하지 못한 수정씨는 인터뷰가 끝나자 몹시 시장해 보였다. 인근의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식사 후에 어디로 갈 건지를 물었다.
"서울역 희망지원센터에 응급구호방이 있어요. 잠잘 곳이 없는 분들이 급히 이용하는 곳이라 잠만 자고 오전 7시가 되면 나가야 해요. 밤에는 오후 10시가 돼야 들어갈 수 있어요. 지금 8시 반이니까 못 들어가죠.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들어가려고요."
무거운 그녀의 가방이 삶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총총히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오랫동안 내 마음을 눌렀다. 십 미터쯤 갔을까 그녀가 갑자기 뒤돌아보며 말했다.
"깜빡했네요. 우리 공연 날짜 잡혔어요. '달팽이음악제'라는 공연이고 12월 5일 강남의 ‘광림 아트홀’에서 해요. 시간 되면 공연 보러 꼭 오세요!“
몇 달째 종민협 간사와 방을 구하러 다니는 수정씨가 방을 구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남들이 겪지 않은 트라우마의 문제도 있지만 관계의 문제도 있다. 오랜 노숙생활로 생긴 보호본능이 유난히 강한 그녀의 정신은 건강하지 않았다. 이런 수정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집이 있다. 바로 ‘지원주택’이다.
앞서 얘기한 임시주거지원사업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2006년부터 시작한 사업이다. 민간의 노력으로 성과가 보이자,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 제 10조(주거지원)의 조항에 시설에서의 보호뿐만 아니라 임대주택지원, 임시주거비 지원의 구체적 항목을 명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주택임대료 보조 이외에 개별 사례관리가 필요한 정신건강 취약자를 위한 서비스는 없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집이 있다. ‘지원주택’이다. 쉽게 말하면 공공임대주택에 복지와 의료서비스가 함께 제공되는 되는 집이다. 외국에서는 이를 'Supportive Housing'이라고 한다. 혼자서 주거유지와 자립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독거어르신, 노숙인, 정신장애인, 발달장애인, 신체장애인 등에게 저렴한 비용의 임대주택과 함께 자립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시설이나 병원 등에 평생 갇혀 살지 않고 지역사회 내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주거 대안이다.
필자는 2017년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지원주택의 필요성과 보급을 늘려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그때 인터뷰했던 A씨는 젊은 시절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15년 동안 일용직을 하며 쪽방에 살았다. 일용직으로 번 돈으로 매일 술을 마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돈이 떨어지자 노숙생활을 했고 몸과 마음이 망가져 정신병원에 입원도 했다. 어느날, 아웃리치 활동가에게 발견되어 지원주택에 입소했다. 입소 후 달라진 생활을 아래와 같이 말했다.
“지원주택에 오고부터는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해졌어요. 이제는 일반 사회인이니까 직업도 정해야 하고, 저축도 해야하고… 우선은 여기계신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아주 잘해주세요. 사소한 문제도 의논하면 들어 주시고, 함께 고민해 주시고, 힘도 주시고. 무엇보다 독립적인 주거 공간이 생기니까, 내가 누울 자리가 있으니까 행복합니다. 입주민들끼리 함께 영화도 보고, 야유회에 가서 여러 사람들과 친해지고, 음식도 나눠 먹고 하니까 사람 사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서울시에서는 2016년 12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2년 동안 정신장애, 알코올중독 노숙인을 위한 지원주택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시범사업 평가 보고서(2019년)에 의하면 지원주택 입주자들 중 약 90%가 주거 안정성을 확보했고, 과반수(61%)가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정신건강이 좋아졌고(91.7%) 끊어졌던 가족과의 관계가 회복됐다(60%). 이러한 성과를 근거로 지원주택 조례를 만들고 2019년에는 노숙인 지원주택 100호를 추가로 공급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한 수치다.
수정씨도 이와 같은 지원주택에 입주한다면 그동안 겪었던 상처를 잊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인간사회에서는 어떤 재화든 수요와 공급이 불균형하다. 지원주택 역시 수요는 많지만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공급이 따라가지 못 하는 게 아니라, 공급을 실행하는 정책적 의지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도 생긴다.
수정씨와 인터뷰를 한 지 넉 달이 지나 12월 되었다. ‘달팽이 음악제’는 강남이 아니라 숭실대의 ‘한경직 기념관’에서 열렸다. 공연이 열리는 날, 하필 그날은 칼바람이 불면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너무 추워서 공연장에 가기를 망설이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자신의 공연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어했던 수정씨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려한 무대에서 공연하는 자신을 보고 ‘내 노래 어때? 노숙인 같지 않지?’라고 으스대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공연장에는 추운날씨에도 아랑곳없이 많은 관객이 왔다. 네 번째 순서가 수정씨가 속한 채움합창단의 공연이다. ‘홀로 아리랑’, ‘Sad Movies’, ‘내 나라 내 겨레’ 세 곡을 불렀다. 크리스마스 시즌답게 빨간색 무대의상을 입은 수정씨가 영어로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다. 마치 수정씨만을 위한 무대 같았다. 수정씨에게 비추는 조명은 그냥 조명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당당히 살아온 그녀에게 하늘 쏘는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