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엄마는 딸을 낳은 게 아니라 인형을 낳았어요.“
2019년 6월, 중랑구에서 살고 있는 김은영씨(가명, 59)를 자택에서 만났다. 은영씨가 살고 있는 집은 매입임대주택이다. 자신을 ‘아바타’처럼 대했다는 은영씨의 어머니를 어떻게 상상해야 할지 난감했다. 어린 시절 은영씨는 경제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사진관을 운영했다. 그렇지만 은영씨의 유년은 행복했던 기억보다 슬프고 무서운 기억이 더 많았다. 아픈 기억을 소환하기 힘든 듯, 숨을 크게 들이시고 입을 열었다.
"엄마는 학교가 끝나면 버스정류장에서 저를 기다리셨어요. 친구들과 놀고 싶었지만 매일 같이 기다리는 엄마 때문에 다른 곳으로 샐 수도 없었어요. 심지어 남자친구에게 연애편지를 쓸 때도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썼어요.“
태릉입구 인근의 카페에서 인터뷰 하는 김은영씨
은영씨의 엄마는 스무살에 은영씨를 낳았다. 엄마는 젊은 나이에 결혼하고 출산한 탓에 자신이 하지 못했던 것을 은영씨를 통해 해소하려 했다. 은영씨 밑으로 남동생이 두 명 있었지만 엄마의 관심은 은영씨 에게만 있었다. 은영씨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엄마의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야 했다. 액세서리도 마찬가지였다. 은영씨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영씨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것처럼 살았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조금만 엄마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매를 맞았다. 엄마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은영씨를 때렸다. 하루빨리 엄마로부터 독립해 엄마의 폭력과 학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방법은 '결혼'밖에 없었다.
대학 시절, 소개팅으로 한 남자를 만났다. 엄마는 자신의 아바타처럼 여겼던 은영씨를 결혼시키고 싶지 않을 줄 알았지만 그 반대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결혼식을 추진했다. 군에 입대한 남자친구가 제대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제대 후 한 달이 지나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은영씨의 나이 24살이었다.
엄마로부터 벗어나 결혼도 했으니 행복할 줄 알았지만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은 무능력했고 학업을 이어간다며 돈을 벌지 않았다. 은영씨는 유치원 교사로 일 하며 생계를 꾸렸다. 남편과 얼굴을 마주 볼 시간이 적었다. 부부 사이는 돈독하지 못했다. 그 사이 은영씨는 불임 판정을 받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었던 그 때, 은영씨는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치는 남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설마 하던 그녀의 짐작은 이내 확신이 되었다. 남편의 몸은 은영씨와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엄마는 그때의 일(남편의 바람)도 저에게 문제가 있다는 듯 말했어요. '저 때문에 아버지와 이혼 위기까지 갔었다'고 하면서요. 저는 엄마로부터 빨리 독립하고 싶었고 엄마도 그걸 원했기 때문에 결혼한 건데. 당시에는 정말 억울했어요. 아버지도 그때의 일을 아시는 것 같았지만 말씀은 안 하세요."
은영씨는 결국 32살에 남편과 이혼했다. 그리고 곧바로 울산으로 내려갔다. 남편의 배신으로 입은 상처가 컸고, 이혼 사실을 안 엄마의 구속은 결혼 전과 똑같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울산에서 교회에 다니며 몸과 마음을 추스를 즈음 목사님이 은영씨에게 한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 낯선 외지에서 마음 둘 곳 없었던 은영씨는 6개월 만에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두 번째 결혼이었다.
"첫 남편의 배신에다 엄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듯 울산으로 내려갔다가 (목사님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토끼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에요. 두 번째 남편을 만나 꾸린 재혼 가정은 일반적인 재혼 가정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를 가지고 있었어요. 남편에게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이 있었어요. 저는 아이를 못 낳으니까 딸이 있는 집안으로 결혼하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남자가 소위 '마마보이'였어요. 돈을 벌면 자기 엄마한테 다 갖다 주고 저에게는 주지 않았죠.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도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제가 맏며느리인데 막내며느리의 갑질이 심했고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시댁은 딸을 돌봐줄 '보모'가 필요했던 거예요. 저는 남편이란 이름의 '남자'가 필요했던 거였어요.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만난 거죠. 그럴 때마다 딸아이만 바라봤어요. 제가 친엄마는 아니지만 따뜻하게 품었어요. 저와 딸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가 돈독해졌어요.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게 9살 때였어요. 친 모녀처럼 의지하며 지냈는데 25살에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때 얼마나 놀라고 슬펐는지 말로 다하지 못해요.“
은영씨는 남편의 딸을 성심껏 키웠다. 불임 때문에 더욱 아이에게 애착을 가졌다. 친엄마 이상으로 아이를 돌보자 아이도 은영씨에게 정을 주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재혼한 지 10년만인 43살에 임신을 했다. 첫 결혼의 스트레스로 다낭성난소증후군 이라는 불임 판정을 받았기에 임신을 하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생각지도 않은 임신이었기에 놀랐고 믿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노산이었으니 걱정이 되었다. 하늘이 주신 선물이니 꼭 낳고 싶었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은영씨의 임신을 축하해주지 않았다. 전처가 낳은 딸만 잘 키워주길 바랐다. 그럴수록 은영씨는 마음을 더욱 굳게 먹었다. 소중한 생명을 꼭 지켜내겠다고 결심했다. 10달 후 아들을 낳았다.
"시댁에서는 저의 임신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배 속에 있을 때는 아들인지 딸인지 모르잖아요. 산달이 다 되어 가는데 출산 준비를 하나도 못 했어요. 남편이 돈을 안 갖다 주니까. 애는 나올 때가 됐는데 기저귀 하나를 준비하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교회 목사님하고 사모님이 어디서 기저귀를 얻어오셨어요. 그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걸 받자마자 삶아서 널었어요. 바람에 펄럭거리는 기저귀를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재혼한 남편은 결혼 초부터 은영씨에게 폭력을 가했다. 말다툼으로 시작한 싸움의 마지막은 남편의 폭력이었다. 첫 번째 남편은 공부한다고 돈을 벌지 않았다. 학비를 대며 뒷바라지 했는데도 은영씨를 버렸다. 두 번째 남편은 전 처의 딸을 자신의 딸처럼 키웠는데도 폭력을 가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기가 불편했다. 은영씨는 아무 잘 못이 없는데 두 남성 모두 은영씨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학대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은영씨는 어떤 선택을 할까. 가슴이 먹먹해서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들었다.
"두 번째 남편은 술만 먹으면 때렸어요. 일주일에 다섯 번은 그랬어요. (허벅지를 보여주며) 여기 흉터 보이죠? 그릇을 던져서 이렇게 된 거예요. 이만큼이 벌어져서 꿰매야 하는 데 꿰맬 시기를 놓쳐서 꿰맬 수가 없대요. 그대로 아문 거죠. 이쪽(이마를 보여주며)도 여기저기 울퉁불퉁해요. 이게 다 맞아서 생긴 거예요. 갈비뼈도 부러져서 병원에 여러 번 입원했고요. 도구를 쓰지 않으면 그나마 상처가 크지 않을텐데 항상 뭔가를 이용해서 때리죠. 어떨 때는 각목으로 때리고, 머리카락을 뽑기도 하고요. 한 번은 남편이 사이다에 농약을 탔어요. 목을 졸라서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데 아들이 말려서 살았어요.
시어머니는 아들이 그런 것을 알면서도 저보고 참으라고만 했어요. 샘도 많았어요. 누구 병원 가면 본인도 병원 가서 누워야 하고, 친구들이 어디 놀러 가면 본인도 놀러 가야하고. 제가 친정엄마한테 하도 당하고 살아서 시어머니한테만큼은 정붙이고 살려고 했는데,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나면 돌변하는 타입이어서 정을 붙이기 힘들었어요."
은영씨는 두 번째 남편의 폭력을 견디기 힘들어 여러 번 도망쳤다.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왔지만 보고 싶다는 딸아이의 전화를 받고 마음이 약해져 다시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딸이 사고로 죽자 악몽 같은 시간은 다시 반복되었다. 결국 6살 난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쳤다. 수소문 끝에 여성긴급전화인 1366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곳의 안내로 여성노숙인 자활쉼터인 '내일의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1년 후 남편은 어떻게 알았는지 내일의 집으로 찾아왔다. 아들을 데리고 갔다. 빼앗긴 아들을 찾으러 다시 울산으로 가 아들과 함께 서울로 도망쳤다. 그 후로 여러번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쳤다가 잡히는 생활을 반복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은 이혼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위자료를 받지 않고 아들의 양육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혼을 했다. 그녀의 나이 51살이었다.
"아이 아빠는 아들을 키운다고 해놓고 방치했어요. 오전에 일한다고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고. 들어와서는 술 마시고. 아이의 끼니를 술안주로 해결하곤 했어요. 아동 학대죠. 아빠가 없는 동안 아이는 개 한 마리와 혼자 지냈어요. (중략). 아들과 전화로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마음이 무너졌어요. 이혼 후에는 파출부로 일하면서 고시원에 살았어요. 양육권을 포기했지만 아빠의 방치 속에서 크고 있는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 찾아오고 싶었어요. 그래서 악착같이 일했어요. 아들을 데리고오면 고시원에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아들과 떨어져 사는 동안 겪었던 마음고생을 이야기하며 그녀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매일 봐도 보고 싶은 게 자식이라는데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얼마나 걱정이 되었을까.
은영씨는 고시원에 살면서 '매입임대주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아들은 울산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5학년이 되자 혼자 은영씨를 찾아 서울로 왔다. 아들이 오자 매입임대주택에 입주했다. 그때부터 은영씨는 아이의 양육권 찾기 싸움을 시작했다.
폭력 남편에게서 벗어나고자 이혼을 했지만 아이의 양육권을 갖지 못해 늘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은영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고 있던 지인이 양육권을 되찾는 싸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양육권을 되찾으면 친부에게 아이에 대한 어떤 도움도 받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아이를 찾아올 수 있었다. 아이를 찾기까지 고시원과 쉼터 생활을 전전했던 은영씨는 ‘내일의 집’에서 겪었던 일을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남편을 피해서 아들과 함께 내일의 집으로 갔어요. 아들이 여섯 살 때 였죠. 몸이 안 좋아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였어요. 다른 엄마들이 돈 벌어 와서 자기 아이들 맛있는 것 사 먹일 때 참 서러웠고 아이한테 미안하더라고요. 햄버거 같은 거 사 와서 자기 아이만 먹이고, 다른 아이들은 먹고 싶어서 쳐다보고. 한방에서 20~30명이 오글오글 싸우면서 살았어요. 아이들끼리 놀다가 싸우면 엄마들이 말리다가 (감정이 격해져) 엄마들끼리 또 싸워요. 저는 나이 들어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힘에 부쳐서 못 싸우고 숨어서 혼자 많이 울었어요. 새벽 일찍 일어나 밥해 먹고 청소하는 건 하나도 안 힘들었는데, 엄마들끼리 이간질하고 싸우는 건 정말 힘들었어요. 거기다 아이 양육권을 찾기 전이라 애 아빠가 언제 아이를 데리고 갈지 모르니까 불안감도 상당히 컸지요."
비슷한 이유로 쉼터에 온 이들과 함께 사는 게 힘들었지만 쉼터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와서 갈 곳이 없으니 노숙하기 직전이었죠. 어디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어요. 힘든 일이 많았지만 ‘내일의 집’은 저를 내 집 이상으로 품어준 곳이에요."
쉼터는 임시거처이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오랫동안 머무를 수 없다. 쉼터에 있는 동안 엄마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립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자립의 기반이란 경제활동과 맞닿아 있기에 아이들은 방치될 수밖에 없다. 시설에 온 엄마들은 한결같이 아이들이 방치되는 것을 걱정했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시설에 왔지만 또 다른 숙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 문제와 지치고 망가진 자신의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은영씨는 쉼터에 있으면서 1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받았다.
"친정엄마에게 받은 학대와 아바타처럼 산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싶었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고 싶었어요. 상담사에게 엄마 이야기부터 했어요. '나는 엄마가 만든 인형이었고 엄마는 나를 통해 대리만족하며 살았다'고 말했어요. 상담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상담사는 듣기만 했어요. 그렇게 진통의 시간을 겪고 나니까 엄마에 대해서 몰랐던 것이 보이고 엄마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어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았을 때는 나 자신을 몰랐는데 상담을 하면서 내가 나아갈 방향이 보이고 아이와 살아갈 방법을 찾게 되었어요."
은영씨 에게는 새로운 남편이 생겼다. 혼인신고까지는 안 했지만 아이의 양육권 찾을 때 누구보다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아들에게는 새 아빠가 돼 주었다. 두 번의 결혼에서 산전수전을 겪고 지칠 대로 지쳤던 은영씨는 단비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다.
"제가 43살에 아들을 낳았으니 늦둥이나 다름없잖아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저하고 잠깐 살다가 시댁에 아이를 빼앗겼어요. 양육권을 완전히 되찾아 온 시기가 아들이 5학년 때예요. 양육권 찾을 때 도움을 준 분과 연이 닿아서 결혼을 했어요. 이제 가족이 된 거죠. 저희 세 식구는 지금 5년째 함께 살고 있어요. 그동안 우리는 정말 몸부림치며 살았어요.“
아이를 빼앗기고 찾는 과정속에서 겪은 아픔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를 찾고 나서도 몸부림치며 살았다는 은영씨의 표정에서 다부진 엄마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엄마라고해서 다 은영씨처럼 살지는 않으니까. 모성은 위대하다는 말로 평가하는 것이 어쩌면 엄마라는 이름의 ‘형벌’이 될 수도 있으니까.
“몸이 안 좋지만 지금도 식당에서 하루에 5시간씩 일하고 있어요. 나이 50이 넘으면 일할 곳이 없어요. 그렇게 일을 해야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고 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해줄 수 있어요. 그래야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자립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다행히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면서 아들에게 저의 빈자리를 채워줬어요.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들도 덜 외롭고요.“
좋은 사람을 만나서 함께 살고 있지만 그에게 부담을 지우기 싫었다. 아들의 양육권을 찾을 때 이미 많은 빚을 졌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않으면 마음이 쉽게 무너질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일했다. 자신이 일 하러 가는 동안 아이를 케어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든든한 사람이다.
“저는 원래 유아교육학과를 나왔는데 방송대학교 교육학과에 다시 들어갔어요. 성폭력 상담교육 과정과 가정폭력 상담교육 과정을 이수했어요. 가정폭력 상담사가 되고 싶어서요. 사회복지 공부도 시작했는데 몸도 아프고 여러 가지 이유로 중단했어요. 교육학 공부는 꼭 마칠 거예요. 졸업 논문 주제도 벌써 생각해놨어요. '쉼터, 그 후.' 저의 경험을 담아 쉼터 이후 자립을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쓰고 싶어요.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이 가정 폭력의 아픔이 있는 엄마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얘기했어요. 부끄러운 얘기는 아니지만 유쾌한 얘기도 아니기 때문에 꺼내기가 쉽지 않았고, 솔직히 말하는 동안 힘들었어요. 노숙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쉼터에서 지내며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고, 아픔을 보듬어 주는 사람을 만나 살고 있기 때문에 참고 이야기했어요."
은영씨는 엄마의 학대와 남편의 가정폭력이 문제였다. 경제적으로 유복했지만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노숙으로 이어질 뻔 했던 길목에서 그녀가 만난 것은 여성일시보호 쉼터다. 쉼터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지만 위기상황에 처한 당사자를 편견 없이 수용해 이후 자립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필자가 아웃리치하면서 만난 노숙인 분들 중에는 시설에 가느니 차라리 노숙을 하는 게 낫다고 하는 분도 있었다. 2012년에 노숙인 인권보장 선언을 만들기 전까지는 거리 노숙인은 통제와 감시의 대상이었다. 거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와 시민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거리 노숙인을 관리 한다는 명목으로 최대한 시설에 입소를 하도록 권했다. 당사자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한 시설 입소, 입소를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건복지부의 「2016년 노숙인 등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여성의 경우 시설의 존재여부를 몰라서 이용하지 않는 경우가 남성보다 많았다. 단체생활과 규칙 때문에(24.5%), 입소자와의 갈등(10.4%), 실내공간이 답답해서(11.5%)의 순으로 시설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를 들었다.
시종일관 담담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해준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며 남편의 퇴근을 기다리는 듯, 현관문으로 자주 시선 돌렸다. 두 번의 결혼에서 겪었던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 언제 있었냐는 듯 평온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소소한 행복은 다른 것에 있는 게 아님을 알았다. 그 ‘평범함’이 오래 지속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6개월 후, 은영씨에게 안부 차 연락을 했다. 작년 말에 인공관절 수술을 하고 쉬고 있다고 한다. 아들은 이제 고 3으로 올라가는데 처음보다 학교생활을 너무 잘하고 있어서 한시름 놓았다고 한다. 새 아빠랑은 티격태격 하면서도 잘 지낸다고 했다.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지금 사는 집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가장 큰 걱정이라고 한다. 국민임대아파트가 나오면 그 곳으로 이사할 계획인 듯하다. 서민이라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집 걱정’, 무리하게 대출받아 집을 사는 바람에 빚에 허덕이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하우스푸어(House Poor)’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빈곤의 층위가 다양해지는 세태에서 오늘은 어떤 비극이 발생할지 아침마다 신문을 펼치기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