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방은 사람 한 명이 누우면 더 이상의 여유 공간이 없다. 전형적인 단신생활자가 사는 방이다. 거리노숙을 하다가 지치거나 거리생활 보다 조금 나은 환경을 찾다가 가는 곳이 쪽방이다. 쪽방에는 화장실이나 부엌이 없다. 방 값은 대부분 월세로 지불한다. 그 좁은 방에 가재도구와 이불 한 채를 두고 짧게는 두어 달, 길게는 십년을 넘게 살기도 한다. 천장이 높아서 머리가 닿지 않을 위치에 선반을 만든다. 선반 위에 잘 쓰지 않는 물건을 올려놓는다.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앉을 곳도 마땅치 않다. 얼굴과 얼굴 사이의 간격은 1미터가 채 안 된다. 사이가 안 좋은 사람도 마주 앉아 1시간쯤 지나면 친밀감이 생길 수 있는 거리다. 그렇게 작은 방에서 소라씨를 만났다.
"다음 달이면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가요. 그곳에는 욕실이 있으니 자주 씻을 수 있어요. 듣고 싶었던 복지관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동안 잘 씻지를 못해 몸에서 냄새가 날까봐 듣지 못했거든요."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이소라(38, 가명)씨는 12년째 쪽방에 살고 있다. 쪽방에 살기 전에는 오랫동안 노숙생활을 했다. 쪽방은 거리생활 후 얻은 소라씨의 유일한 공간이다. 그녀는 악착같이 버티고 버텼다. 언젠가는 쪽방보다는 나은 곳에서 살 수 있다는 야무진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그렇게 십 여 년을 기다렸고 드디어 한 달 후에 이사를 간다며 자랑을 했다.
"제가 어릴 때 엄마가 몸이 매우 아프셨어요.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죠. 당시에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걸 바로 알지 못했어요. 엄마가 당신의 죽음을 저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대요. 장례식이 끝난 후 외할머니가 말씀해주셔서 그때 알았어요. 충격이 컸지만 견뎌야 했어요. 저보다 9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얼마 안 돼 새어머니가 오셨어요. 4년 정도 함께 살았는데 참 힘들었어요. 갈등의 골이 깊어져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마치고 자퇴를 했어요. 그리고 집을 나왔죠. 집을 나와서 무작정 간 곳이 고속버스터미널이에요."
오랜 투병 끝에 엄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새어머니를 들였다. 새어머니는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부터 아버지와 만나던 분이다. 소라씨는 엄마의 부재와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새어머니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마음 둘 곳이 없던 소라씨는 매일 지하철을 타고 인천에서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왔다 갔다 했다. 집에 갈 시간을 놓쳐 고속버스터미널이 있는 지하도에서 잠을 청한 것이 노숙 생활의 시작이었다. 한겨울 추위를 견디기 힘들 때면 고속버스터미널 5층에 있는 교회에 들어가 새벽 예배를 본다는 핑계로 잠을 청했다.
가출로 돈 한 푼 없던 소라씨는 지하철비용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소라씨는 4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후유증으로 왼쪽 편마비가 왔다. 당시 뇌전증도 같이 왔다. 장애 등급을 받았다. 장애인으로 등록하면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표를 끊으려면 500원의 '보증금'이 있어야 한다. 월미도에서 만난 아는 아저씨가 그녀의 손에 얼마간의 돈을 주었다. 소라씨는 그 돈으로 빵과 우유를 사 먹고 나머지는 보증금으로 썼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쪽에는 오전 5시가 돼야 버스가 다녀요. 그 시간이 되면 떡과 꼬마김밥을 파는 할머니가 나오세요. 그 할머니가 저를 많이 챙겨주셨어요. 떡도 주고 김밥도 주고. 대신에 제가 할머니를 많이 도와드렸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오면 짐도 들어 드리고요. 제가 고속버스터미널을 떠나고 난 뒤 몇 년 만에 갔는데 할머니가 그대로 계신 거예요. 그때 정말 반가웠어요. 그런데 재작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노숙할 때 저를 먹여 살리신 할머니인데.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슬퍼서 막 울었어요."
소라씨는 넉살이 좋아 어디를 가도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힘든 노숙 생활 중에도 사람을 잘 사귀었다. 덕분에 다른 노숙인들이 소라씨의 물건을 훔쳐 가는 일도 없었고, 성폭행을 겪는 등의 일도 없었다.
"노숙 생활이 무섭지는 않았어요. 저는 어린 나이에 무서움을 이미 겪었거든요. 여섯 살 때 유치원에 갔다가 오니까 아빠가 엄마를 때리고 있었어요. 그 장면을 보고 너무 무서워서 외할머니 댁으로 뛰어갔어요. 그 후에도 자주 그런 일이 있었어요. 너무 무서워서 보지는 못하고 소리만 들었어요.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렸는지 몰라요. 이게 웬만한 무서움은 견딜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다짐했죠. 아무리 무서운 일이 있어도 엄마를 생각하면서 견디자고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남긴 편지가 있어요. 지금도 편지 내용을 기억해요.“
"나의 사랑하는 딸 소라에게
보고픔이 가득한 성탄절이구나. 사랑하는 딸 소라야, 얼마나 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모쪼록 건강히 지내고 웃어른 공경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사랑 듬뿍 받는 소라가 되어다오."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던 어느 날, 꽃동네 수녀님을 만났다. 수녀님은 장애가 있는 소라씨에게 입소를 권했다. 오랜 노숙 생활로 악화된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녀는 입소를 결정했다. 22살부터 25살까지 그곳에서 보냈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지내다 보니 몸과 마음이 망가졌어요. 배가 고프니까 주는 대로 먹고 잠을 편히 못 자니 우울증이 와 이가 빠지기 시작했어요. (윗입술을 들어 보이며) 지금 윗니는 하나도 없어요. 3년 동안 꽃동네에 살면서 상자 만들기를 했어요. 입소한 후 가장 답답했던 게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살아야 하는 거였어요. 어느 날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설에서 나가려면 몸이 안 아파야 하고 자립 능력도 있어야 해요. 꽃동네에서 저의 퇴소를 쉽게 허락해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매일 기도했어요.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요. 결국 수녀님과 상담 후 퇴소했어요."
꽃동네를 나온 소라씨는 갈만한 곳이 없었다. 꽃동네에서 상자 접기를 해서 모은 돈은 그렇게 큰돈이 아니었다. 그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쪽방이었다. 마음에 드는 방은 월세가 비싸다. 어렵게 얻은 후암동의 반지하 쪽방, 그곳은 말이 ‘집’이었지 온전한 주거형태가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무서웠어요. 양 옆방에 다 남자 분들이 살았거든요. 노숙할 때는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같은 노숙인끼리 도와주기도 하는데, 여기는 남자들이 방에 불쑥 찾아오면 방법이 없어요. 또 한 가지 불편했던 점은 독립적으로 쓸 수 있는 샤워 공간이 없어요. 쪽방은 1평이 약간 넘는 자신만의 공간을 빼면 모두 공동으로 사용하니까요."
그래도 쪽방은 노숙과 시설 생활을 하고 6년 만에 만든 '나만의 공간'이었다. 쪽방 생활을 하면서 한 남자도 만났다. 2년 정도 함께 살았다. 혼인신고까지 할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어느날 남자는 소라씨의 기초생활수급비를 훔쳐서 도망갔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힌다고 했던가. 소라씨는 6개월 후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순애보 적으로 소라씨만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2009년도 교회에서 하는 합동결혼식에서 식을 올렸다. 올해로 10년째 결혼 생활 중이다. 남편을 만나면서 그녀의 우울증도 많이 나았다.
"오빠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요. 제가 다리도 안 좋고 숨이 가빠서 잘 걷지 못하거든요. 2년 전부터 전동휠체어를 타기 시작했는데 오빠가 항상 옆에서 경호원처럼 챙겨줘요. 공주가 된 것 같다고나 할까요? 이건 10년 전에 오빠랑 결혼식 할 때 찍은 사진이에요.“
소라씨가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며 행복하게 웃었다. 소라씨보다 열 살 많은 남편 때문에 종종 아빠와 딸 같아 보인다는 오해를 받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멋있는 남편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보라”며 받아친다. 환한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서 노숙을 했던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소라씨 부부는 사진에 모자이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말이 맞았다. 소라씨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으니까.
"엊그제 부활절 행사가 있어서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봉사하고 왔어요. 이만한 밥 그릇에 밥 놓고 반찬 놓고 계란 넣고. 봉사활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다른 이에게 내 마음을 주는 거니까. 마음을 열고 활짝 웃으면서 공손하게 인사할 때 행복감을 느껴요. 교회에서뿐 아니라 거리에서 우울하게 구석에 앉아 계시는 어르신을 만나면 다가가서 안부를 여쭈어요. '할머니 왜 식사 안 하세요? 맛있는 식사 하셔야죠. 할머니가 안 드시면 저도 안 먹을 거예요'하면서 애교도 떨고요."
소라씨는 5월 말에 쪽방에서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한다. 그녀는 평생 함께 할 사람과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지낼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녀에게 '제2의 인생'이 시작된 셈이다. 두 세 번의 인터뷰로 그녀의 삶을 다 알 수는 없다. 눈물로 지새운 밤이 얼마나 많았을지, 동 터오는 새벽, 첫차를 기다리며 얼마나 가족을 그리워했을지 짐작만 할 뿐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소라씨는 당부하듯이 말했다.
"저는 이제 노숙을 안 해요. 하지만 아직도 거리에는 노숙하는 여성이 있고 노숙하는 장애인이 많아요.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노숙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도 마찬가지예요. 행색이 좀 지저분해도 그들을 무시하지 않고 똑같은 사람으로 대했으면 좋겠어요."
필자가 방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소라씨가 비닐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 속에는 먹음직스러운 빵이 들어있었다. 인터뷰 끝나고 같이 먹으려고 샀단다. 빵을 보니 허기가 몰려왔다. 한 사람의 굴곡 많은 인생 이야기를 듣느라 배고픈 줄 몰랐다. 집에 가서 먹는다며 빵 봉지를 들고 나오는데 그녀가 말했다.
소라씨가 건넨 먹음직스러운 빵. 아무것도 챙겨가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임대주택으로 이사하면 초대 할게요. 꼭 놀러 오세요!”
소라씨를 인터뷰한 지 넉 달이 지난 추석 즈음, 그녀가 이사 간 집으로 찾아갔다.
휠체어를 타는 소라씨는 명절 음식을 만들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집 근처 시장에 들러 전과 양념해 놓은 고기를 샀다. 새로 이사한 곳은 지난번 살던 곳에서 멀지 않았다. 흔히 임대주택이라고 하면 아파트를 연상하기 쉬운데 소라씨가 이사 간 집은 아파트가 아니다.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임대 사업의 하나인 ‘기존주택 전세임대’였다. 집 안에 화장실과 부엌이 있다는 점이 쪽방과 달랐다. 오랫동안 쪽방에 살다가 이사한 소라씨는 이만한 집이라도 구한 것이 어디냐며 연신 웃음꽃을 피웠다.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집 자랑을 했다. 남편과는 여전히 사이가 좋다.
“화장실이 (집)안에 있어서 좋아요. 부엌도 있고요. 에어콘이 달려 있어서 많이 더울 때는 에어콘을 켜요. 그리고 창문이 있어서 좋아요. 남편은 이제 한시름 놓았다면서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어요. 결혼할 때 못 해준 반지를 사준대요. 마음에 걸렸나봐요.”
소라씨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거리노숙을 했지만 정신질환은 없다. 2016년 보건복지부,「노숙인 등의 실태조사」에는 여성홈리스의 80~90%가 심각한 우울증이나 조현병 등의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남성홈리스보다 약 3~4배나 높은 비율이다. 여성 홈리스가 노숙을 하게 된 이유는 남성홈리스처럼 단순 실직이나 가족해체 때문이 아니다. 이혼과 별거로 빈곤상태에 내몰려 주거위기 상태에 놓일 때다. 이로 인해 우울한 심리상태가 길어지고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해 만성정신질환으로 이어진다. 정신질환 여성홈리스의 재활을 돕는 시설, ‘아가페의 집’ 염원숙 원장은 “노숙을 해서 정신질환이 오는 경우보다 노숙이전의 개인적인 환경이 좋지 않거나 유전적인 이유로도 정신질환이 생길 수 있다. 정신질환이 있으면 판단력이 흐려져 노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입소한 분들 중 40~50대가 가장 많은데 20대의 경우는 가족과 연락이 닿아도 당사자의 정신질환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호자이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이곳에 입소해서 꾸준히 치료를 받고 좋아져 퇴소한 분들도 많다”고 했다.
필자는 2019년 12월, 혹시라도 거리에 나온 여성이 있으면 대화를 해 볼 요량으로 영등포역 주변을 배회했다. 한 시간쯤 돌아다녔으나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 역 근처에 있는 노숙인 일시보호소에 들러 여성홈리스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었다. 실무자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여성분들이 위험한 거리에 나와 있을 것 같아요? 만약에 나온다면 그분들이 왜 나오는지 아세요?”라고 물었다. 퍼뜩 떠오르는 게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다가 ‘가정폭력 때문에 집을 나오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실무자는 내 대답을 안다는 듯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오는 분들은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쉼터에 가요. 거리에 나오지는 않죠.” ‘그렇다면 답은 뭐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거리에 나오는 분들은 대부분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요. 아니면 피해망상을 갖고 있거나. 그분들은 만나도 대화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도 만나시겠어요?” 답을 못 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거리에 없다고 해서 여성홈리스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거리에 늘 도사리고 있는 남성들의 부추김, 언제 누구에게 폭행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함, 가고 싶지 않지만 시설 입소를 권하는 실무자를 피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것을. 그것도 아니면 역 주변 외에 PC방, 사우나, 여관, 교회, 기도원, 요양원, 종교시설 등에서 잠시 몸을 피하거나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머리를 짧게 깎은 채로 지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오늘은 운이 좋아 응급쉼터에 자리가 생겨 그곳에서 하룻밤 잠을 청하는지도 모를 일이고.
김두나(2008: 172)는 여성홈리스가 눈에 띄지 않는 이유를 서울역, 영동포역과 같이 홈리스 밀집 장소나 홈리스 쉼터에서 생활하는 가시화된 홈리스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쉼터에 입소한 여성홈리스의 수가 남성에 비해 매우 적은 이유는 여성홈리스를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주변화 시켰기 때문이며 이러한 전제는 남성들과 다른 삶의 조건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 여성홈리스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남성 실직 노숙인에 집중했던 관심과 지원을 여성홈리스에게도 가질 필요가 있다.
오랜 노숙생활을 하다보면 심리사회적인 손상을 입는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특징이 ‘자기효능감’ 저하다. 자기효능감이란 어떤 결과를 얻는 데 필요한 행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신념이다. 노숙을 하다보면 자기효능감이 떨어져 자신의 부정적 상황을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의 능력으로 탈 노숙과 자활을 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한다. 여성홈리스는 이런 생각을 더 자주 한다. 열악한 주거상황, 경제적 빈곤, 자립을 위해 필요한 자원의 부재, 신체 및 정신적 건강 문제는 자기효능감을 떨어트리기 충분한 조건이다. 이는 홈리스가 되기 전에 스트레스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경험이 많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서울에는 정신질환 여성홈리스를 위한 시설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서대문에 위치한 사단법인 ‘열린여성센터’이고 다른 하나는 성북구에 위치한 사단법인 ‘아가페의 집’이다. 열린여성센터는 정신질환이 있는 여성홈리스의 치료와 자립을 돕고 정신질환이 없는 여성홈리스도 수용하는 자활쉼터다. 아가페의 집은 열린여성센터 보다 더 만성적인 정신질환이 있는 여성홈리스들의 치료와 재활을 돕는 시설이다.
단신여성의 쉼터 입소 요인은 정신질환, 가정해체, 빈곤문제 등으로 정신병원이나 여성복지시설에서 일정기간 보호를 받다가 가정으로 복귀했지만 원 가정생활에 여전히 문제가 있거나 스스로 독립생활을 할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퇴소했을 때다. 이때 다시 노숙을 하거나 노숙인 쉼터를 이용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가정해체, 가출, 정신장애 등으로 주거공간을 상실해 종교시설, 요양원, 숙식제공 일자리, 더부살이, 여관, 사우나등의 부랑생활을 지속적으로 한 후에 입소하는 경우다.
정신질환이 있는 거리의 여성홈리스는 아웃리치 상담원이 발견하거나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발견된다. 이때 발견된 여성홈리스는 본인의 동의하에 일시보호 쉼터나 자활쉼터에 간다. 쉼터에서 생활하는 동안 정신질환 치료를 받고 증상이 호전되면 자립을 위한 활동을 한다. 쉼터에서는 단체 생활을 하기 때문에 개인생활을 갖기 어렵다. 막말로 ‘창살 없는 감옥‘인 셈이다. 꽃동네에 입소했던 소라씨도 그래서 시설을 박차고 나와 ’쪽방‘으로 갔다. 하지만 쪽방 역시 온전한 주거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아서 불편하다. 시설이나 쪽방이나 도긴개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