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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May 20. 2019

우리가 수어를 배워야 하는 까닭

몸의 언어에서 배우는 말의 태도

9년째 일하던 직장을 그만 두고 수어(수화)를 배우는 친구가 있다. 대학 시절 영상 디자인을 전공하고, 얼마 전까지 회사에서 디자인 관련 업무를 하던 친구였다. 평소에도 좀 더 자기개발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하긴 했지만, 자유인이 되자마자 처음 해보는 게 수어라니. 게다가 그 친구는 특별히 언어를 배우거나 하는 일에는 크게 소질이나 흥미가 없다고 느꼈던 탓에 나는 뜬금없다는 얼굴로 “대체 왜?” 하고 물었다. 친구의 대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했다.


“그냥, 흥미롭게 느껴져서.”


어느 날 어떤 뮤직비디오를 우연히 보게 됐는데, 노래 가사를 수어로 표현하는 컨셉이었다고 했다. 그 발상과 표현이 흥미롭다고 느껴져 다소 충동적으로 수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게 됐다는 것.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영상이라는 시각적 요소에 익숙한 그가 몸을 통해 의사전달을 하는 수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 수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세 달이 되어간다는 친구는 신체를 이용해 말을 전달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했다. 동작을 외우고 몸으로 나타내는 것 자체도 깨나 힘이 들지만, 무엇보다 같은 동작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뉘앙스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 표현력을 기르기가 어렵다고 했다. 특히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을 할 때 표정을 크게 사용하지 않는 탓에 굳어버린 근육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적잖이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한 작업일 것 같았다.  


Oliver Sacks

세계적인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Oliver Sacks)에 따르면 “수어는 하나의 언어로서 완벽성과 고유성을 가진다”고 한다. 또한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이들은 ‘공간’을 언어에 사용하기에 음성언어를 쓰는 사람보다 복잡한 공간 패턴을 훨씬 더 풍부하게 이해하고 이를 의사소통에 활용하는 특수한 인지구조를 갖는다고 한다. 곧 수어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보조언어라기보다 하나의 고유한 언어에 가깝기에, 이를 학습하는 어려움 역시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의 그것과 견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나라의 사람과 문화를 알아야 해당 언어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수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공간을 다른 눈으로 인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세계와 마주해야 할 터였다.


‘수어 시장’은 의외로 매우 수요가 높았다. 매달 중순이면 그 다음 달 수강을 위해서 일종의 수강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했다. 마치 대학 시절 원하는 수업을 수강하기 위해 아침부터 피씨방에 앉아 종종거리며 마우스를 클릭했던 것처럼, 간발의 차이로 제때 클릭하지 않으면 원하는 수업을 듣지 못하기 십상이란다.


수어의 시각적 요소에 흥미를 느낀 친구를 포함해 입시생, 취준생, 주부에 이르기까지 수강생의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그 중에는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눈과 귀를 닫고 싶다며 그 대안으로 수어를 배우는 이도 있다고 했다.


문득 요즘 SNS상에서 유행을 한다는 ‘고독한 ㅇㅇ방’ 형태의 오픈 채팅방이 떠올랐다. 이 채팅방에서는 말을 하지 않고 이미지로만 대화를 해야 하는데 이미 수천 명의 유저들이 사용할 만큼 인기가 많다고 한다. 고독한 세계에서 누군가와 연결은 되고 싶지만 음성언어를 통한 소통에 싫증이 난 사람들의 최후의 발로랄까.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 수화를 배우기로 한 그 수강생 역시 비슷한 마음으로 학원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까.


일러스트레이션 : 황하초

가끔은 같은 언어로 대화를 나눠도 상대방이 내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완전한 문장으로 이뤄진 말이지만 상대방의 의사를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로는 누군가가 아무렇게나 뱉은 말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반면 상대방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보다 대화가 잘 통한다고 느낄 때도 있다. 어쩌면 정말 언어란 구사 능력과 관계없이 마음을 담는 그릇으로서 제대로 작동할 때 본연의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 아닐까.


수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같은 동작이라도 본인이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에 동작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다고 한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말의 언어 속에서 깨진 그릇을 주고받으며 상처를 안고 사는 오늘의 우리 또한 언어를 대하는 태도를 배우기 위해서라도 수어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건 아닐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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