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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May 02. 2019

홍콩을 읽다

여행의 의미에 대해서 

지난해 12월 홍콩에 다녀왔다. 어딘가 가까운 곳으로 여행은 가고 싶은데 일본은 뭔가 익숙한 느낌이고 중국은 딱히 당기지 않았다. 그나마 홍콩이 그리 멀지 않고 3~4일 쉬기에 적당하다는 지인의 추천으로 특별한 준비 없이 떠난 여행이었다. 


‘야경’과 ‘쇼핑’이 유명하다는 홍콩에서 나는 여타의 여행책자에서 볼 수 있는 관광루트를 따라 3박 4일을 보냈다. 함께 간 남자친구는 관광지에는 되도록 가지 말고 여유 있게 보내자고 했지만 나는 ‘언제 또 홍콩에 와보겠느냐’는 생각으로 제법 타이트하게 일정을 짰다. 


2018년 12월의 홍콩

명품으로 즐비한 쇼핑센터에서는 되레 구매욕을 잃어 쇼핑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른바 ‘명소’라는 곳들을 찾아다녔다. 스타의 거리에서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보며 항구를 둘러싼 빌딩들이 쏟아내는 불빛에 환호했고, 낮에는 배우 장국영이 즐겨 찾았다는 딤섬집에 들러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의 딤섬을 먹었다. 홍콩 디즈니랜드에서 하루를 보냈고, 어떤 날에는 트램을 타기 위해 반나절을 기다리는 수고로움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밤에는 유명 술집이 많다는 롼콰이퐁에서 맥주를 마시고, 영화 <도둑들> 배경으로 유명해진 5성급 호텔에서 호화로운 잠을 청했다. 무엇보다 나는 오랜 영국 식민지로 인해 본토와는 다른 홍콩만의 이국적인 분위기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대만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는 룽잉타이와 그의 아들 안드레아가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 『사랑하는 안드레아』를 읽게 됐다. 책은 서로 다른 성장 배경과 언어, 세대적 차이를 지닌 모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보여주며 서로를 이해해 나가는 한 편의 과정이다. 책에서는 생활태도, 정치, 문화, 예술 등 다양한 소재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중 ‘홍콩의 문화’에 대한 두 사람의 논의가 특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독일에서 자란 안드레아는 홍콩에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되면서 ‘문화가 없는 홍콩’에 대해 적잖이 실망하고 비판한다. 


“여기서 두 달 정도 생활해보니 유럽과 근본적으로 다른 한 가지가 있는데, 그건 바로 홍콩에는 문화가 부족하다는 거예요. … 유럽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시간을 들여 교류하기를 원하죠. 진득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잡담하기 위해 잡담을 나눠요. 그건 생활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일상이에요. 그런데 홍콩에는 이런 일상이 없어요.”


룽잉타이와 아들 안드레아


아들의 볼멘소리에 룽잉타이는 홍콩의 현실을 설명한다.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에서 과로로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은 카페에 죽치고 앉아 한가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고. 쫓기듯 살아가는 삶에서 이들에게는 사상과 영감, 상상력보다는 효율성과 돈벌이가 제일일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책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뿐만 아니라 편지를 읽은 독자들이 보낸 편지도 일부 발췌해 수록하고 있다. 홍콩 문화에 관한 논의를 둘러싸고 독자들은 자조 섞인 태도로 자국 문화의 부재에 동의하기도 하고, 카페 문화는 없지만 식당 문화를 비롯한 그들만의 문화가 존재한다고 반박하기도 한다. 혹자는 카페가 없어서 고급문화가 자생할 수 없다면 산에 사는 원주민들에게는 어떤 문화도 없는 것이냐며,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이곳의 문화가 서양의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고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그 수많은 목소리를 목격하며 나는 약 4개월 전 찾았던 홍콩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내가 본 홍콩과 책 속의 홍콩은 사뭇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녀온 지 겨우 몇 달 지났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항구를 비추던 밤의 불빛만이 파편처럼 기억의 언저리에 일렁였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이곳에서 무얼 보고 어떤 생각을 했던가? 안드레아가 말하는 문화의 부재를 깨닫기에도, 룽잉타이가 대변하는 삶에 쫓겨 치열하게 살아가는 홍콩 사람들의 일상을 느끼기에도 나의 여행은 너무도 피상적이었다. 영어 간판이 가득한 화려한 거리를 지나 온갖 빨래거리들이 작은 창문 밖으로 나부끼는 낡은 건물들을 바라보며 나는 홍콩의 가난이나 양극화를 생각하기보다는 그 생경함이 선사하는 분위기에 취하지 않았던가. 현지인과 대화를 나눈 것이라곤 식당의 종업원이나 지하철의 역무원이 전부였다.


홍콩의 거리

우리는 여행에서 무엇을 구해야 할까. 물론 일상을 벗어나 거금을 들여 간 여행에서 심오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오직 상업적인 정보에만 의존해 온종일 맛집이나 관광명소를 쫓아다니는 여행은 그 장소를 제대로 이해하고 느끼기에는 너무도 허탈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카페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홍콩에는 문화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안드레아의 미숙한 판단처럼 피상적인 여행의 연속이야말로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조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올해 나는 벌써 3개의 여행 계획을 세웠다. 다음 여행에서는 좀 더 관조적 태도로 새로운 장소를 탐색할 수 있을까? 관광지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 줄을 서는 데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그 곳 사람들의 일상과 표정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 문득 떠남의 무게가 새로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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