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기 의한 최소한의 바운더리
B는 4년이 넘도록 A에게 괴롭힘을 당했지만 차마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오랜 용역 생활에 지친 B에게 정규직이 된다는 건 정말 절실한 일이었다. 고용 안정을 보장 받으며 일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이 근무 조건이 B에게는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기회였다. 먼저 정규직이 된 A는 “자신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정규직이 될 수 없을 것”이라 협박하며 B에게 막말과 폭행을 일삼았다. 그런 과정에서 B가 싫은 내색을 하거나 크게 반항하는 일이 없자 A는 B에게 어떤 행동을 해도 된다는 나름의 정당성을 갖게 된 것 같았다.
심지어 같은 팀의 리더도, 주변의 동료들도 그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혹은 알면서도 방관했는지도 모르지만 A는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B에게 가혹 행위를 한다거나 소리를 지르는 법이 없었기에 쉽게 알아채기 힘든 상황임에는 분명했다. 나 또한 A와 B를 함께 알고 지내며 가끔은 밥도 먹는 사이였는데, A가 종종 B에게 성질을 부린다는 것쯤을 알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B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어보이며 A를 달랬기에 사태가 이 정도인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A는 보통 “나 아니면 누가 B를 챙기겠어”, “이번에 B 꼭 정규직 시켜줘야지” 따위의 말들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나는 A가 겉으로는 성미가 사나워보여도 인정머리는 있는 사람이라 회사 내에서 누구보다 B를 챙겨주는 친구인 줄만 알았다. 정말 너무도 순진한 착각이었다. 타인 앞에서 자신을 위하는 척 떠들어대는 A를 바라보던 B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B의 사연을 접한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여 A를 비난했지만, 동시에 A가 그렇게 하도록 방치해 둔 B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했다. 어떤 상황이었든 B가 그렇게 당하도록 스스로를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이야 쉽지, B의 상황이 직접 되어보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판단할 수 있을까? 참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될 지도 모르는 직장 내 위계 폭력 속에서 저항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나조차도 비슷한 상황에서 상대방과 대적하기보다는 도망하는 편을 택했으니까. 오랜 시간 폭력에 익숙해지다 보면 이에 맞서 반항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엄청난 일이 되어버린다.
나는 직장 생활 2년차부터 1년 반가량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나를 특정해서 괴롭혔다기보다는 그 사람 자체가 워낙 어려운 인물이었던지라 팀원 모두가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을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사내에서 최연소로 팀장이 된 그는 나보다 10살 많은 여상사였는데 최연소 팀장이라는 타이틀이 보여주듯 일욕심이 무척 많은 스타일이었다. 부하 직원이 자신이 기대하는 만큼 일을 해내지 못하면 조언을 해준다거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기보다는 “왜 그것밖에 하지 못하느냐”며 화를 내고 상대방의 자존감을 깎아내림으로써 성과를 끌어내려 했다.
일터에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나 행복이 아닌 ‘성과’였으므로 사무실 밖 보통의 윤리, 예컨대 연령, 역량, 성향 등에 따른 개인의 차이는 그에게 배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화가 나면 욕설을 퍼붓는 것은 물론 책상 주변의 물품을 던지며 긴장감 흐르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우리는 매일 그의 기분이 어떤지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당시 우리 사무실은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는 가끔 친근감의 표시라며 우리를 “이년아”라고 불렀다. 그와 함께 일을 하면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부분이 바로 이와 같은 ‘언어폭력’이었다. 그때 나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수없이 소리 쳤다.
결국 함께 일하던 2년차 계약직원은 견디다 못해 일을 그만 뒀다. 알고 보니 그는 가장 어리고 힘이 없는 계약직원에게는 손으로 머리를 민다든가 하는 신체적 폭력도 몰래 일삼고 있었다. (이 친구 역시 당할 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다 일을 그만둔 뒤에야 우리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팀에서 20년 넘게 일한 상근계약직 선배동료는 우울증에 걸리기 전에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며 전근 신청을 했다.
셋이 함께 친하게 지내던 것을 꺼려하던 차에 두 사람이 팀을 나가자 나를 향한 그의 괴롭힘은 한층 심해졌다. 특히 약자일수록 괴롭힘의 강도가 컸기 때문에 계약 직원들이 없으니 팀의 막내이자 가장 만만한 나에게 화살이 돌아왔다. 그때 나는 일은 차치하고 그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너무도 끔찍했다. 아침마다 회사에 가는 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마음에 병이 들었다는 진단을 내렸을 무렵, 나는 미뤄뒀던 인사 이동 신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