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셀마는 체코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건너온 이주민 노동자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언제 손목이 잘려나갈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공장에서 일하는 그는 자신과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를 가진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기도 하다. 이미 제대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지만, 그는 아들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밤낮으로 일을 한다. 칠흑처럼 어두운 세상에서 셀마를 이끄는 작은 빛은 바로 음악이었다.
“힘들 때 나만이 하는 유희가 있죠.
공장에서 일할 땐 기계음이 리듬처럼 들려요. 그럼 꿈을 꾸는데 모든 게 음악이 되죠.”
영화에서 셀마는 노래를 빌어 현실과 꿈의 세계를 넘나든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발을 구르는 소리,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누군가의 숨소리.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 그에게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곧 음악이 된다. 일상의 소음마저 음악의 뼈대가 된다. 음악이 넘치는 꿈의 세계에서 셀마는 무엇도 두렵지 않다.
공장에서 기계음을 하나의 노래로 표현한 사운드트랙 ‘Cvalda(크왈다)’
<어둠 속의 댄서>(2000)는 일반적인 뮤지컬 영화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영화 속 음악은 셀마를 연기한 비요크(Björk)의 존재감만큼이나 기괴하고 독특하다. 비요크는 음악계에서도 가장 혁신적인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색깔을 공고히 해나가고 있다. <어둠 속의 댄서>에 등장하는 모든 음악을 직접 프로듀싱하며 여타의 뮤지컬 사운드트랙과는 다른 자신만의 개성을 가감 없이 선보인다. 그의 음악이야말로 이 비극적 영화를 한 편의 아름다운 서사시로 만들게 한 ‘빛’이었다. 신인 배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셀마는 현실의 비요크가 그러하듯 음악을 미학의 도구로 삼지 않는다. 혹은 자신의 비극을 드러내는 창구로도 사용하지 않는다. 음악은 그에게 순수한 즐거움이다. 꾸밈이나 가식 따위는 없이 한 마리의 짐승처럼 노래하는 그 완벽한 순수함은 셀마의 현실과 대비되어 눈시울을 뜨겁게 적신다.
라디오헤드의 보컬 톰 요크가 함께 부른 ‘I’ve Seen It All’. 첼로에서 발생하는 각종 소리를 곡의 소재로 사용한 점이 흥미롭다
수난 당하는 여성들의 연대적 삶
아무리 허구라고는 하지만 영화 속 셀마의 인생은 너무도 참담하다. 장애와 가난이 점철되어 있는 그의 삶은 배신과 억울한 누명으로 끝이 난다. 영화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고통 받는 여성의 모습을 그려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이미 작품 속에서 ‘여성에 대한 지나친 폭력’을 그리는 것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나치를 두둔하는 언행으로 영화계 ‘기피인물’로 낙인 찍히는가 하면, 2017년에는 비요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영화 촬영 당시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발함으로써 미투 운동 가해자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비요크는 영화를 통해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지만 이후 영화계를 떠난 것과 다름없는 그의 행보를 살펴보면 당시 영화 촬영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의 댄서> 속 셀마에게는 이야기가 있다. 셀마를 통해 그려진 수난 당하는 여성의 서사를 통해 우리는 여성의 삶, 나아가 소수자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여성들의 연대’다. 냉혹한 세상 속에 셀마의 생을 다독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주변의 여성들이다. 셀마와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캐시(까뜨린느 드뇌브)는 셀마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다. 셀마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 그는 공장에서 셀마가 다치지 않도록 옆에서 보살피며 야간업무를 같이 해주는가 하면, 음악을 좋아하는 셀마를 위해 영화관에서 장면 하나하나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반복된 실수로 셀마가 공장에서 해고되었을 때 그를 대신해 ‘그럼 어떻게 먹고 살라는 것이냐’며 거세게 항의를 하고, 영화관에서 시끄럽게 떠든다며 싫은 소리를 하는 남자에게 ‘우리도 돈을 내고 영화 보러 왔다’고 당당하게 대꾸하기도 한다. 사형 선고를 받은 셀마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 또한 캐시였다.
셀마의 불가피한 살인이 ‘아들을 향한 사랑’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여성 교도관은 하나의 인간이자 자신과 동일한 어머니라는 존재로서 셀마에게 연민을 느낀다. 적막만 가득한 교도소 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며 괴로워하는 셀마의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셀마가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고 형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가 있었기에 셀마의 죽음은 조금은 덜 외로워 보였다.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다
자신처럼 될 줄 알면서 왜 아이를 낳았냐는 질문에 셀마는 대답한다.
“안아보고 싶었어요, 내 품에”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도 못한 셀마는 그저 엄마가 되고 싶은 한 여인이었다. 그는 기댈 곳 하나 없는 타국에서 이웃의 작은 배려나 도움의 손길조차 죄스럽게 느끼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벅찬 그에게 사랑이란 곧 ‘사치’에 가까웠으리라.
제대로 된 항변 한 번 하지 못하고 끝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지만 셀마를 향한 보이지 않는 여성들의 응원과 연대 속에서 나는 문득 현실 속 셀마를 생각한다. 국내에 수많은 결혼 이주 여성들, 노동자들, 미혼모, 장애 여성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이들의 삶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까. 앞서 언급한 범주에 속하지 않더라도, 이 시대의 수많은 여성들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장벽에 맞닥뜨려 있다. 감독에 관한 논란을 차치하고 영화는 ‘비요크’라는 우리 시대 가장 독립적인 아티스트의 몸을 빌어 비극 속에서도 빛을 향해 나아가는 여성들의 연대에 대해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