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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Sep 24. 2020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나에게

입사 후 첫 인사이동을 겪으며

인사이동이 났다. 이번에도 내 이름은 없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전혀 생각지 못한 부서 명단에 내 이름 세 글자가 쓰여 있다. 


전 직원의 순환근무를 기본으로 하는 우리 회사는 6개월에 한 번씩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발표한다. 나는 애초에 일반 행정직이 아닌 홍보직군으로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전문성도 인정받았던 터라 대내외적으로 홍보팀의 붙박이처럼 여겨졌다.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고 편집하는 과업이 나의 주된 업무였다. 실제로 홍보팀에서 콘텐츠를 담당하던 일부 직원들은 20년 가까이 이 부서에서만 근무하기도 했다. 선례가 있었기에 이번 인사이동에서도 팀장이 누가 오느냐에 주의를 기울였을 뿐 내가 어딘가로 이동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입사 이래 6년 만의 첫 이동이었다. 나는 기존에 하던 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업무를 하는 곳으로 발령이 났다. 까마득했다. 사실 이 회사에 오래 다닐 생각이라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이 부서를 거쳐 기본 행정 업무를 익히는 것이 이로웠다. 주변 선배들도 차라리 잘됐다,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익숙한 일을 뒤로 한 채 완전히 새로운 업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게다가 홍보팀 업무가 마냥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으나 지루한 일반 행정 업무를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늘 생각했었다. 


이동은 빠르게 이뤄졌고 발령 후 나는 다시 늦깎이 ‘신입사원’이 됐다. 9월 초는 새로 이동하게 된 부서에서 특히 바쁜 시기였다. 제대로 인수인계를 받을 새도 없이 온갖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민원을 접수했다.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도면도 제대로 못 보는 내게 건물관리 업무까지 주어졌다. 하필 9월에는 각종 공간개선 공사가 연이어 대기 중이었다. 나는 이 부서에서 신입이나 다름없었지만 회사 전체적으로 본다면 대리급이었으므로 애초에 전임자가 하던 일보다 더 많은 일을 분장 받았다. 


지루한 일,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막상 일반 행정 업무를 배우고 처리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기획력이나 고도의 스킬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제때 문서를 접수하고 처리하는 데에는 남다른 꼼꼼함과 성실함이 필요했다. 고객을 대면하는 상황도 많아져서 친절함은 기본이었다. 하루에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수십 가지였고 공문을 작성하고 데이터를 확인하다 보면 반나절이 금방 지나갔다. 방역회사 담당자를 따라다니며 건물 곳곳에 쥐약을 놓고, 어떤 때는 공간 개선 공사를 위해 도면을 보며 시공사 입찰을 공부했다. 


“여기서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새로운 곳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일들을 수행하며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었다. 동시에 나는 어쩌면 과거에 우습게 생각했거나 내가 할 것이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직접 겪어보며 ‘노동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어떤 일이든 나름의 정성과 숙련도가 필요하며 어떤 일이든 존중 받을 필요가 있다고. 과거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스스로의 둘레에 갇혀 얼마나 오만했던가. 그러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는 여전히 힘들다. 


과거의 나는 스스로를 기쁘게 하고 세상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취업난 속에서 하고 싶다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 ‘일에서 의미를 찾지 말라’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어쩌다 운 좋게 얻은 직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생업에 크게 의미 부여를 하지 말자고 스스로와 타협하며 이 일을 해 왔는데, 돌이켜 보니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나도 모르게 또다시 의미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레바논의 대표 작가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라는 저서에서 ‘일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논한다. 


일이란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랑입니다. 

만일 그대들이 사랑으로 일하지 못하고 미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일한다면, 차라리 일손을 놓고 사원의 문 앞에 앉아 기쁘게 일하는 사람의 자선을 구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일은 귀중하며 사랑을 담아 일할 것을 주문한다. 모든 노동은 사랑이 없는 한 공허한 것이라고. 


이 낯선 일터에서 나는 지브란의 조언처럼 내가 하는 노동의 고귀함을 깨닫고 사랑을 담아 일할 수 있을까? 맞지 않는 옷이 불편하기만 한 지금,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동시에 끝없이 오만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일에서 무엇을 구해야 하나. 자본주의 시대에 일을 통해 스스로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바람인 걸까. 공허한 노동 속에서 생각만 많아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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