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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Oct 21. 2020

그때 그 소녀들은 사랑했을까

소설 <항구의 사랑>이 남긴 것들

이제는 아이돌 가수를 잘 구분할 줄도 모르는 구세대가 되어버렸지만 내게도 ‘오빠들’을 쫓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3년부터 고1에 이르기까지 나는 H.O.T의 열렬한 팬이었다. 여느 팬들과 다름없이 용돈을 모아 앨범을 사고, 사진을 모으고, 방학이면 팬클럽 무리들과 함께 콘서트를 보러 서울에 갔다. 브로마이드로 잔뜩 도배된 방 안 책상에 앉아 오빠들의 숙소라는 곳으로 팬레터를 보내며 상상의 나래를 펼지기도 했다.


나름 문학소녀였던 나는 팬들 사이에서 인기였던 각종 팬픽을 섭렵했다. 시작은 이지련 작가의 무협소설 <협객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PC 통신에는 오빠들을 주인공으로 한 각종 소설(그중 다수는 야설이었다)이 떠돌아다녔고 대부분의 팬픽 속에서 오빠들은 이성이 아닌 서로를 사랑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어느 순간 오빠들이 서로를 원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고 이는 내가 처음 동성애를 접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나는오빠들을 따라 칼머리를 한다거나 힙합바지를 입고 다니는 부류는 아니었으나 팬픽을 소비하면서 당시 팬덤의 이반 문화에 깊게 심취해 있었다. 세이클럽이라는 플랫폼에서 밤새 채팅을 하며 역할극을 하거나 사이버 여자친구를 만들기도 했는데 실제로 만난다거나 하는 용기는 내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그건 동성애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라기보다 2000년대 초반 아이돌 팬덤이 만들어낸 소녀들의 놀이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때였다.


한때는 오빠들을 영원히 사랑할 것만 같았는데, 이 뜨거운 사랑은 고2가 되면서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허공처럼 흩어져 버렸다. 곧 대학에 가야 하니 이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지만 문득 애틋한 마음이 사라져버린 탓이 더 컸다. 스스로에게도 놀랐다. 팬심이 이렇게나 허무한 것이었나.


세이클럽에서 채팅을 하는 것도 싫증이 났다. 대신 한 학년 선배 언니를 보며 좋아하는 마음을 느꼈는데, 그 또한 어울려 놀며 같이 있고 싶다기보다는 -오빠들을 동경했던 것처럼- 멀리서 바라보며 혼자 설레어 하는 짝사랑에 불과했다. 그때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목적으로서 사랑한다기보다 가슴 속에 넘쳐나는 사랑을 쏟아낼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와는 관계없이.


오빠들을 향한 사랑이 갑자기 꺼져버린 것처럼 그때의 나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최근 김세희 작가의 소설 <항구의 사랑>을 읽으며 불현 듯 나의 그 시절이 떠올랐다.


 87년생 작가는 그가 중고등학생 시절 경험한 팬덤과 이반 문화, 그 과정에서 겪었던 첫사랑, 그리고 여자를 사랑했던 소녀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이지만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나를 비롯해 동시대를 거쳐온 수많은 그녀들의 그때 그 시절을 소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를. 기묘하지만 너무도 강렬했던 그 마음을. 돌이켜보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 세계가 너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 않았나.


그렇다고 해서 잊은 건 아니었다. 기억하려 애쓰지는 않았지만 결코 잊히지도 않았다. 어떻게 잊겠는가. 여자끼리 사귀는 모습은 10대 후반을 보내는 사이 익숙해졌다. 그런 일들은 마침내 ‘자연스럽게’ 보였다. 여학생들의 사랑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다. 적어도 그게 가능한 일처럼 보였었다. 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스무 살이 되어 들어간 세계는 조금 전까지 내가 몸담았던 세계와 이어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유년 시절 이후로 나는 다시 한번 자신감을 잃었다.


이후로는 내 삶에 대해 생각할 때 그 부분을 건너뛰곤 했다. 그때의 나도 나인데 빼 버리고 싶었다. 앞뒤와 연결되지 않는 그런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그 부분까지 포함한 나 자신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 항구의 사랑 중에서


친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아 책은 무척이나 쉽게 읽혔다. 장편인데도 하루이틀 새 다 읽었던 것 같다. 작가의 문장들은 가만하지만 꾸밈없이 마음에 와 닿는다. 스낵처럼 가벼운 것 같았는데 책장을 덮은 뒤 책 속의 소녀들이 애써 외면하려 했던 과거의 나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를 좀 더 사랑하고 보듬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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