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쓰며 감정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지만, 이 마저도 결혼. 출산과 함께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내 비밀친구는 20대까지 내 정신의 안정과 성장을 함께해 왔는데, 집안의 가정사로 인해 번아웃을 크게 겪으며 글이라는 치유의 비상구마저 차단되었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이 사실을 마주하는 건 고통스럽다. 방어막을 치느라 안 그래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향이 무기력증으로 이어졌다. 내게 들어오는 데이터마다 자주 혼돈을 느끼며 분석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하고도 결과는 명료하지 못할 때가 많다. 분석이 끝나야 실행을 할 텐데 깊은 고민이 생기면 분석의 괘도는 거의 뫼비우스의 띠 수준으로 돌고 돌았다. 그 십 수년간의 세월은 비교적 평온했던 과거에 쌓아 올린 내 넉넉한 자존감과 일일이 이별의 악수를 청해 오고 있었다. 암담했던 시간을 지나고 보니 남은 건 깊은 공허함과 쉽게 돌아오지 않는 “현실감각”이었다.
첫 아이 출산의 감격이 가시기도 전에 예고 없이 찾아온 시어머님의 암 진단, 그리고 9개월 간의 힘겨운 투병 끝에 우리 가족은 그렇게 허망한 이별로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큰 아이 돌이 갓 지났을 무렵, 예정돼 있던 남편의 회사 이전으로 우리는 경상권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듬해 둘째를 가졌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다시 타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아이들과 남아 주말부부 시대를 맞이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한다던 그 주말부부. 지친 우리에게도 휴지기가 필요한 차였다.
평소 늘 따라다녔던 남편의 업무과다 스트레스와 잦은 음주와 건강문제, 시아버님의 갑작스러운 소천으로 다시 한번 하늘이 무너짐을 느꼈다. 이 시기 갈팡질팡하던 남편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웠다. 집안의 대소사와 함께 내게도 육아 우울증이 세게 찾아왔다. 게다가 아이들을 몇 년간 품에서 돌봐주신 친정엄마에게 서른 중반 사춘기를 맞이한 못난 딸은 투정이란 투정을 다 부린 거 같다. 어린 시절 비교적 순종적으로 자라왔던 나는 온전한 인간으로 독립을 이루고자 육아를 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철저히 몸부림을 쳤던 것 같다. 나 자신으로 바로 서고 싶은 강한 열망이 분화구에서 솟구치는 화염 같았다.
있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난 왜 이렇게 우울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걸까?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자존감은 땅끝까지 꺼져있었다. 작은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 자체가 상당한 공포로 다가왔고 그 어떤 일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나를 드러내고 무대 위로 올라가면 평가받고 비난받을 것 같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엉킨 실뭉치를 재빨리 끊어내고 벗어나고 싶지만 어떤 용단을 내릴 수없어 옴짝달싹 못하는 우화에 나오는 어리석은 인물처럼. 온실 속 30년 안전가드가 휘청거리니 내 자존감은 생각보다 작은 것이었더라. 온전한 내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치열하게 증명해 보여야 할 일은 없었다. 이제 마흔 넘어 흔들리는 세파에 단단해질 이유를 찾고 있다. 저 멀리 더 큰 파도에 살아남기 위해.
야속하게도 생의 주기 속 악재는 무리 지어 오기도 한다.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다 올가미에 걸려 조여 오는 상상의 구도를 벗어나, 모든 상황을 다각도에서 관조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내가 보낸 결혼 십여 년의 세월 속에서 가슴에 품고 가야 할일들과 개인적인 아픔을 이제는 현상과 현상 그 자체로 바라보려 한다. 그 현상은 내가 저항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온전히 내 아픔으로 받아들여 말라 시들어 가던 찰나였다. 내 시간의 주체는 더 이상 콜드케이스에 허우적거리다 절망에 빠지길 거부하고 싶다.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그 이상의 세월을 거치면서 어두웠던 삼십 대 내 인생그래프를 '상승곡선으로 올려놓을 수있을까'. 보기에 지나가는 ‘사람 N’의 모습으로 살아 갈지라도 자신을 토닥토닥 보듬어 가며,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내 길을 담담하게 걸어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