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고주스는 언제나 옳다

님만해민과 반캉왓의 카페들

by 연희동 김작가

우리 손녀는 암만해도 나를 닮은 것 같다. 얼굴이 아니라 기질이 닮았다. 지가 좋은 건 군소리 않고 하는데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싫단다. 어제 등산을 할 때만 해도 어른들보다 더 앞서서 잘 걸어가더니 오늘 아침에는 잔뜩 심술이 났다. 여기 와서 절만 다닐 거냐고 자기는 절이 싫다더니 이내 치앙마이가 싫어졌고 급기야 동남아 여행은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고는 자신은 호텔 수영장에서 물놀이나 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열대지방이라고 해도 12월 야외수영장의 수온은 발목이 차갑다. 아닌 줄 알면서도 아이 엄마는 놀래어 호들갑을 떤다. 시니어와 주니어가 함께하는 우리 여행의 리더는 명쾌한 결정을 했다


''오늘은 각자 취향에 맞는 여행을 하는 날로 정합니다''


솔로몬보다도 더 지혜로운 해결이다. 사실은 나도 오늘쯤에는 시내의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여유 있게 차나 마시며 어제 등산의 후유증으로 뭉친 종아리를 마사지로 풀고 싶었던 참이었다.


딸네 가족은 정글 숲으로 액티비티를 즐기러 떠났고 우리 부부는 님만해민의 중심가인 마야 거리의 볼 것들을 찾아 천천히 나섰다.


핑강


치앙마이는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핑강을 사이에 두고 올드시티와 신도시인 님만해민 지역으로 나뉜다.

님만해민은 서울의 강남 같다고나 할까? 높은 빌딩은 없지만 밤에 본 이 거리는 거대한 샹들리에처럼 눈부시게 반짝였다. 하지만 낮에는 밤의 화려한 모습과 달랐다. 거리의 골목에는 수수하고 분위기 있는 카페들이 많아서 눈으로 즐기기에 좋았다

마침 우리가 여행을 한 기간 중에 예술인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어서 이곳 중심가에 있는 원 님만 쇼핑몰 거리에는 솜씨 좋은 장인들이 만든 물건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진열되어 있었다.

참 볼 것도 많고 쉴 곳도 많은 도시다.


예술인 페스티벌


오늘은 국왕의 생일이어서 이 나라의 국경일로 지정된 날이다.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국왕의 사진이 담긴 커다란 금빛 액자가 거리마다 장식되어 있고 더운 열대지방, 그것도 전 국민이 불교신자인 불교국가에 크리스마스트리가 곳곳에 세워져 있는 것도 퍽 이채로웠다.

"나의 종교는 신뢰를 기지고 남의 종교는 존중하라"라고 했던 달라이 라마의 말씀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국왕의 사진과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님만해민 거리


책자에 소개된 유명한 카페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실 카페는 분위기도 좋아야 하지만 커피맛도 당연히 좋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처음 들어간 카페에서 커피가 아닌 망고주스를 시켰다.

오늘 아침, 호텔 조식에 나온 갓 구워 낸 빵이 너무 맛이 있어서 이미 하루에 마실 양의 커피를 다 마셔버렸다. 이제 더 이상 커피를 마신다면 오늘 밤 수면은 자진 반납해야 된다.


달콤 향긋한 망고주스

망고를 선택하길 잘했다. 잘 익은 싱싱한 망고를 얼음과 함께 갈아 만든 망고 주스는 우와! 천상의 맛이었다.

나는 망고를 참 좋아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망고 알레르기가 있다. 처음 망고를 먹었을 때, 멋모르고 넙적한 씨를 쪽쪽 빨아먹었다가 입 주변이 온통 붉게 부어 올라서 본의 아니게 조커처럼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스로 만들어서 먹으면 알레르기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접촉성 알레르기였던가 보다.

치앙마이의 거리를 달리는 툭툭

사슴의 뿔처럼 하늘로 치솟은 금빛 사원의 화려한 모습과 달리 시내의 건물들은 작고 단조롭고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많다.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과 닮은 듯 다른 이 곳만의 문화는 바로 자연스러움이었다. 꾸미기보다 있는 그대로 펼쳐두었다. 편안하고 유려하다. 주변의 국가들이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음에도 꿋꿋하게 지켜 낸 이 나라만의 문화가 바로 이런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카페도 늘어진 열대의 꽃들 사이로 오래된 탁자와 의자가 군데군데 놓여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는데 왠지 정감이 간다.


실타래처럼 얽히고 늘어진 전봇줄과 약간 시큼한 냄새. 누런 핑 강의 물색. 이런 것들은 착하고 선한 이곳 사람들의 눈빛과 저렴한 가격으로 보상되고도 남는다. 오히려 세련되지 않은 이곳의 풍경이 더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디에 앉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게 만든 카페 의자




예술의 마을 반캉 왓


반캉왓은 님만해민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동네다.

예술가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사는 소박한 동네라고 들었는데 오늘은 휴일이어서 인지 사람들도 많고 동네가 떠들썩했다. 널찍한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황토먼지가 폴폴 나는 신작로를 걸어 마을로 들어섰다.


반캉왓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카페와 가게들


숲 속에 있는 작은 마을에는 개성 있는 가게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다. 액세서리와 생활 장식품, 라탄으로 만든 가방과 소쿠리. 그리고 모자와 옷을 진열한 가게들이 작은 골목을 이루고 있다, 수를 놓고 레이스로 꾸미고, 그림으로 그리고 조각하여 만든 특이한 디자인의 물건들이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똑같은 물건이 하나도 없이 개성이 있는 것은 모두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여행객들을 가장 많이 만난 곳도 이곳이어서 흡사 작은 인사동과도 같은 분위기가 연상되었다.


이곳 역시 커피맛이 좋은 카페가 많아서 내가 쇼핑을 하는 동안 남편은 내내 어느 카페 한 곳에서 나를 기다렸지만 지루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예술촌에서 조금 떨어진 39 카페를 찾아갔다. 아침에 딸아이가 추천을 해 준 곳이다.

숲 한가운데에 호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웅덩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큰 물가에 빙 둘러 데크가 둘러쳐져 있고 그 위에 편안하게 앉아서 쉴 수 있는 자리들이 마련되었다. 그냥 자연 속의 쉼터 같은 찻집이었다.


이 곳 사람들은 특별하게 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하지 않고 자연을 그대로 삶 속에 끌어들여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이 곳 역시 여행자들 사이에서 꽤 입 소문이 났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마치 산림욕을 하듯 편안하게 쉬었다가 갈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음료수를 마시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오래 머문다고 눈치를 주지도 않는다. 물가 한 편에 떠 있는 빨간 카누 하나가 여유로움에 쉼표를 찍는다.


고즈넉한 39 카페


오늘만해도 망고 주스를 벌써 석 잔이나 마셨다. 밖에서 보았을 때 분위기가 좋아서 들어 가 본 님만해민 시내와 이 곳 반캉 왓의 카페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종업원이 없이 주인이 가게를 운영하며 손님들을 직접 맞고 있었다. 혼자서 커피를 내리고 주스를 만들었다. 세련되지 않았으나 적당히 품위가 있고 적당하게 소박하다. 바쁘다고 서둘지도 않고 흐트러졌다고 바로 정리하지도 않지만 이 곳에 앉아있으면 여유롭고 마음이 편안하다.

나는 39 카페 주인이 만들어 준 망고 주스와 커피, 구운 빵을 쟁반에 담아 들고 호숫가 평상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타일랜드의 젊은 연인들이 수줍게 연애하는 모습을 보며 40년 전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