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맨 처음 시작하는 나이, 요즘에는 네 살, 아니면 그 이전에 엄마 품을 떠나 어린이집에서 일찌감치 시작하는 사회생활을 나는 느지막하게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오빠들과 어울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3의 성으로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놀다가 엄마손에 이끌려 처음 학교라는 곳에 들어갔다.
창 밖에 서 있는 엄마만 고개가 아프게 바라보던 내가 어느 날부터 혼자서 학교에 가게 된 건 순전히 친구들 때문이었다.
무서운 화장실도 함께 가주고 여자들끼리도 잘 놀 수 있는 놀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무엇보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아이들이 많다는 것에 적응을 하면서 차츰 엄마와 떨어지는 게 수월해졌다.
가방 색깔과 연필과 지우개의 모양이 비슷하다는 공통점으로 시작해서 서로 닮은 취향을 가진 아이들이 주변에 모였다.
친구는 나와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다. 인생의 반은 친구에게서 배운다. 어쩌면 배우자나 다름없이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게 친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 F4( 네 명의 Flower)는 만났다.
60년 전, 똑 같이 엄마의 치마폭에서 손을 놓고 아침마다 목이 터져라 집 앞에서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함께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이다.
세월은 많은 친구들을 걸러내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의 친구만이 옛 모습 그대로 늙어가고 있다.
시골 읍내에서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란히 다니다가 대학으로 직장으로 각자 뿔뿔이 헤어졌던 우리가 다시 만난 건 첫 아이를 등에 업은 앳띈 새댁이 되어서였다.
모두들 낯선 서울에 둥지를 틀고 산다는 공통분모가 우리를 서로 보듬게 하였다. 고향 친구는 엄마보다 형제보다 더 반가웠다.
넉넉지 않은 신접 살림살이와 곤혹스러운 시집살이를 견뎌낸 것은 어쩌면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우리는 자신의 고통처럼 아파하고 위로해 주었다.
언제인가 우리 네 명이서 기차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여수로 가는 전라선 기차 안에서 숨죽여 이야기하며 웃고 떠드는 우리의 모습이 보기 좋았던지 옆 자리에 앉아있던 중년의 남자가 말을 건네었다.
''고만 고만하신 분들끼리 어디를 가시는데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고만고만한 사람들, 우리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우리는 고만고만하다. 사는 형편은 각자 다르지만
함께 모이면 교복을 입은 소녀들처럼 분간하기 어렵다.
사춘기와 갱년기를 함께 보내고 똑같이 며느리가 되고 시어머니와 장모님이 되더니 이제는 똑같이 할머니가 된 우리들...,
이런 우리의 인연을 보고 불가에서는 억겁의 인연이라 할 것이다.
부부는 이 세상에서 떠날 때 내 손을 잡아 줄 단 한 사람이라고 한다. 친구는 마지막으로 헤어진 뒤 나를 그리워해 줄 사람이다 그래서 좋은 친구를 많이 둔 사람을 인생을 잘 살아온 사람이라고 한다.
아직도 내 집 앞에서 아침마다 나를 부르던 그대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들. 그래서 머리가 하얗고 돋보기를 써도 나이를 잊고 살았는데 어느덧 우리 우정의 나이가 회갑을 맞이 하였다. 60년 된 할머니들의 우정은 종갓집 씨간장보다도 더 깊은 맛을 우려낸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날, 나는 머리에 검은 물을 들인다. 젊고 예쁜 친구를 보면서 나도 친구만큼의 나이로 보이겠지라고 생각한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친구를 위해 한 껏 치장을 한다.
경아, 희야, 연아야...,
F4는 이제 시드는 꽃( Flower)이 아니라 잘 익어 향기로운 열매(Fruit)가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