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지 마세요가 가장 놀라운 말이었다.

아카시아 꽃이 피었습니다

by 연희동 김작가

10년 전의 일입니다. 놀라지 마세요


사람들이 과거 이야기는 왜 꺼내는지..., 이미 지나간 일을 들추어서 다시 아파할 일이 또 뭐가 있다고..., 누군가는 쿨하게 지나치고 넘어가는 일도 누군가에는 아픔이 되어 도지는 병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 교훈이 되어 불행을 막게 하기 위한 것도 있다. 나의 라테는 후자에 속한다.


오십 대 후반, 삶에 자신감이 똘똘 뭉쳐 있을 때였다. 아이들은 제 할 일을 다하고 있고 우리 부부는 퇴임 후의 계획을 서서히 준비하고 있었다. 어쩌면 인생이란, 편안한 노후를 위해 젊음을 투자하는 지도 모른다. 나 역시 열심히 일을 하면서 다가올 노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건강 역시 걱정이 없었다.

내가 세운 계획에는 어떠한 이변도 생기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나의 이런 무모한 자신감을 무너뜨릴 폭탄이 내 몸속 깊숙이 숨어 있을 줄 아무도 몰랐다.


건강검진 후. 대장에 용종이 발견되었고 다시 종합병원에서 용종 제거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조직검사를 했고 나는 의사 앞에서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놀라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의 이 말이 나를 더 놀라게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터덜터덜 혼자서 병원에 왔고 놀랄 준비따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놀랄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이 반어법에 나는 의사의 입에서 곧 터져 나올 무서운 단어를 상상하며 점점 쪼그라들고 있다.


''암입니다''


몇 초간 실신을 했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어둠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아무렇지 않은 듯 결과를 전하는 의사 선생님이 너무 무심해서 눈물이 났다. 나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너 때문에 눈물이 났다.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다. 평생 한번 들을까 말까 한 이야기를 의사 선생님은 어쩌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기야 누구보다 더 많이, 자주 했던 말일 테니까....


내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나는 이제 뭘 해야 하는지..., 하루 앞도 모르는 주제에 노년의 계획을 세우고 산 내가 멍청해 보이고, 무엇보다도 내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은 곧 태어날 내 손녀를 안아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빌어먹을 운명이 너무 슬퍼서 그냥 아기처럼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내가 소리 내어 울자 의사 선생님이 그때야 놀랐다.

암덩어리에도 놀라지 않던 의사 선생님이 아기처럼 퍼질러 울고 있는 환자를 보고 어쩔 줄을 모른다.


보호자님과 함께 오시지 않았나요? 보호자에게 떠 맡길 수도 없는 고약한 환자는 간호사에게 의지하여 암의 진행과 전이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 검사를 받으러 이곳저곳 검진을 받으러 다녀야 했다.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아직 남편 외에 아이들에게는 내 병을 알리지 않았다. 내 삶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는데 굳이 가족들에게 미리 알려서 나로 인해 하루 라도 먼저 슬퍼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딸아이는 첫아기를 임신 중이었고 아들은 원하던 직장에 취직이 되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나만 슬퍼하면 된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모정'으로 하는게 옳겠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일주일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지옥을 체험한 것 같았다.


검사 결과로 나는 내 병이 얼마만큼 중한지 알게 되고 이어서 치료방법도 계획할 수 있다. 암이 내 몸 안에 터를 잡고 살았다는 건 확실하기 때문에 한가닥 희망은 제발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결과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드디어 최종 검사결과를 알 수 있는 날이다.


창 밖으로 쏟아지는 한 줄기 빛,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의 하얀 팔에 솜털이 가득하다. 이 밝음은 좋은 징조일 거야, 나보다도 함께 간 남편이 더 긴장하고 있다.

한참을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의사 선생님. 나는 우리 세 사람이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를 모두 셀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합격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내 등을 치며 외친 말이다. 합격했다고 한다. 잠시 어리둥절했다.

모든 검사 결과에서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지 않은 소위 초기 암환자로 결과가 나왔다.

종양조직 결과를 알려 줄 때와 달리 나보다 더 기뻐하는 의사 선생님에게 나는 비겁할 만큼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누구에든 무조건 고마웠다. 합격이라는 말이 이처럼 가슴 벅찬 말인 줄 처음 알았다.


내 삶은 암 진단 이후와 이전의 삶으로 나뉜다. 젊음은 뭐든 내 마음대로 조율될 줄 알았다. 나만 열심히 하면 나의 미래는 내가 계획한 대로 당연히 이루어질 줄 알았다.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렸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다니는 종합병원의 건물이 멀리서 바라보인다. 그 병동을 바라보는 마음이 전과 달라졌다. 그곳에 내가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며 감사하다는 생각에 이어 그곳 병실에 있는 환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도를 한다. 내 주변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한 발자국 앞 일도 모르는데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 달려왔던 삶. 이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다. 덤으로 주어진 하루를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한다. 오늘 하루가 편하면 매일 이어지는 삶이 즐거워진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변했다고 한다.

내일을 믿지 않고 오늘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사는 모습이 변했고 나에게는 어떤 불행도 비껴갈 것이라는 원인모를 자신감이 자만으로 보였을 지난날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변했다.


해마다 그날을 일깨워주는 향기...,

그동안 내 몸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은 응징이었다. 이 기분에 달콤한 꽃향기를 느껴야하다니...

암 진단을 받고 병원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아카시아 향기를 맡았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향기를 맡으며 나는 울음을 턱에 삼켰다.

그날의 아팠던 아카시아 향기는 그 후로 오늘까지 열 번을 더 맡았다.


살면서 가끔 그날의 일을 잊을 때가 잊지만 오월 아카시아 꽃이 피면 나는 그날의 아픔과 또 그날의 다짐을 떠올린다.

누구나 자신은 바르게 살았다고 한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열심히 산 것과 잘 살은 것은 다르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매일 아침 창문을 열면 보이는 종합병원 병동의 건물을 보며 오늘 하루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건강한 몸을 선물받았으므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건 필수다.


나는 생각한다. 내 삶이 다 하는 날 내가 살아온 인생을 누군가 채점하고


''합격입니다''


크게 소리 질러 줄 그 누가 있었으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