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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Jul 15. 2020

감자 옹심이 말고 자작나무 숲



강원도 인재에 있는 자작나무 숲으로 남편 친구 부부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언젠가 책자에 소개된 글을 보고 한 번쯤 가고 싶었던 곳이다.


팬데밐 이후 첫 여행이다. 아침 일찍 서둘러서 나온 도로에는 차들도 드물다. 에어컨 대신 활짝 열고 달리는 차창으로 미세먼지 하나 없는 바람이 마구 쏟아진다. 장마기간 중에 용케도 맑은 오늘, 그동안 내 몸의 일부가 된 답답한 마스크를 벗고 시원한 공기를 실컷 마시고 싶다. 주변의 초목들도 고운 제 때깔을 드러내고 있다.


북쪽의 외곽도로를 두 시간쯤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3Km가 넘는 산길을 걸어가야만 자작나무 숲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에게나 자신을 함부로 보여주지 않겠다는 자작나무의 자존심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다.


산 입구의 두 갈래 길에서 우린 망설였다.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윗길은 폭이 넓고 가까운 거리였고 아랫길은 폭이 좁고 거리가 조금 먼 산길이다.

의견이 반으로 나누어졌다. 정확하게 남자와 여자의 의견이 달랐다. 이럴 땐 두 말 없이 여자들의 선택이 이기게 되어 있다.

우리는 조금 멀지만 폭이 좁은 아랫길을 택했다. 길이 좁으면 뭔가 아기자기하고 그늘이 드리워질 것이다. 우리들의 감이 맞아떨어졌다 


양쪽에 우거진 숲을 두고 꼬불 꼬불 걷는 산길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들이 피어 있다. 야생화들과 통성명을 하느라 걸음이 느린 우리를 멀찍이서 기다려 주는 남편들. 아내의 말은 무조건 따르고 보자고 하면서도 윗길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얼굴이다.


아. 네가 '가는 범꼬리'라는 꽃이구나.., 동네 화원에서 값을 치르고 꽃인데 이곳 등성이에는 지천으로 피어있다.

눈에 익은 꽃들이 많다. 인터넷 사전을 펴서 이름을 기억하고 일일이 눈 맞춤을 하고 걷느라 시간은 걸리지만 힘든 줄은 몰랐다.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다 보니 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그렇지 이렇게 푸른 숲 속에 시냇물이 없다면 뭔가 채워지지 않은 거겠지 바위를 들추면 가재가 나올 듯한 야트마한 계곡에서 우리는 모두 발이 되었다.


시냇물 가운데에 펑버짐한 돌덩이를 옮겨 도란도란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누군가 만들어놓았다. 아마 전에 이곳을 다녀간 산책객들이 만들어 놓은 듯하다. 계곡의 쉼터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오랜만에 여유를 부려보기도 했다.


계곡의 상류를 따라 난 길은 조금 전의 숲길과는 다른 비탈진 산길이지만 숨이 가쁠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자작나무 숲이 보이지 않고 싱그런 풀냄새가 가득한 숲길일뿐이다.

   

얼마만큼 올라갔나 싶었는데 한발 먼저 도착한 친구 부부가 함성을 지른다.


곧이어 내가 본 것은 나무의 눈이었다. 무표정한 하얀 얼굴에 박힌 눈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자작나무는 그렇게 나와 첫인사를 나누었다.

                                                            

                     

자작나무는 여자들의 로망이다. 아니다. 여자인 나의 로망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맨 먼저  자작나무가 있는 창가를 바라보며 아침을 맞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설이나 영화 속에 무수히 많은 나무들이 등장하지만 유난히 자작나무가 그려진 소설과 영화가 기억에 남는다.


지금 이 숲 속의 자작나무는 온통 초록의 수풀에 흰색의 나무 등걸이가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있다. 한 여름 무더위에도 끄떡없을 청량감, 눈으로 바라만 봐도 시원하다.  


겉은 희고 속은 단단한 나무, 그러게.., 꼭 내 취향이다. 예전에는 하얀 겉피에 연서를 써서 보내기도 하고 속이 단단하여 팔만대장경을 새긴 나무 중에 자작나무가 있다고도 한다. 부드럽고 강직함을 두루 갖춘 외유내강한 나무다.


자작나무 숲에 오르는 길목에서 처음 숲과 마주쳤을 때의 느낌은 설렘이었다. 약간의 흥분과 곧이어 흥분을 정화시켜주는 초록과 하양의 청순함...., 인재의 자작나무 숲은 밝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연애소설을 읽은 기분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좌판에 송화 버섯을 펼쳐놓고 파는 아줌마에게 낚였다. 한번 먹어만 보고 가라며 싱싱한 생송화 버섯을 고소한 참기름에 찍어 주는 걸 받아먹고 그 향기에 혹하여 한 박스를 샀다. 실은 점심때가 훨씬 지난 시간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먹어도 맛이 있을 시간이었다.

강원도에 왔으니 강원도 특산물을 먹어야겠지? 상냥한 목소리의 내비게이션이 인재 시내의 한 식당으로 안내한다.


메뉴판에 적힌 대로 감자전과 메밀국수, 감자 옹심이를 시켰다. 푸짐한 음식과 함께 카메라를 든 취재기사가 들이닥쳤다. 무슨 일이람. 마침 이 날이 TV 프로그램에서 강원도 감자를 홍보하는 프로를 찍는 날이었고 우리는 감자 요리로 꽤 유명한 식당에 온 것 같았다. 카메라 기사님은 하룻 내 모자를 쓰고 다녀서 눌릴 대로 눌린 머리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은 화장끼 없는 내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이 음식의 맛에 대해 감정을 표현해 달라고 한다.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

여자는 화장발 머리발인데 이 몰골을 전국 방송에 내 보낸다고?  안될 일이다. 내 남편에게는 보여줘도 내 옛 연인에게는 절대로 보여 줄 수 없다.

나는 내 옛 애인에게 언제나 상큼하고 청순한 자작나무 같은 여인이어야 한다.


정중하게 거절하고 그러고도 못 미더워서 월요일 저녁 방송을 시청했다. 후루룩 냠냠 친구 부부가 맛있게 옹심이를 먹는다. 어머나 쫄깃하고 맛있네요, 남편 친구 부인의 너스레가 귀엽다.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친구 부인은 요즘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린다고 한다. 오늘은 멀리 제주도에 사는 친구가 오랜만에 소식을 보냈다고 한다.

자작나무 숲을 보러 가서 감자 옹심이를 더 기억하게 생겼으니 이게 웬일이냐며 웃는다.


이번 가을에는 감자 옹심이 말고 황금빛으로 물든 자작나무 잎을 보러 가자고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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