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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Aug 09. 2020

 널 낳은 건 내가 분명해

40년 전에 산 노트의 이름이 '낮과 밤'이었다.

첫 아이를 낳고 밤낮으로 힘들어 있을 때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제목이라서 이 노트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첫 아이를 낳고 쓴 육아 일기장을 40년 만에 다시 본다.

감회가 몰려온다. 엄한 침대 시트만 쥐어짜며 겪었던 산통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처음으로 내 품에 안아 본 아이의 따뜻한 촉감과 비릿한 아가의 내음이 마흔 해를 넘긴 지금도 금방 조금 전의 일처럼 생생하다.


나는 스물일곱 살에 엄마가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물일곱 살은 아직 철이 없을 때다. 새벽에 진통을 느끼고 겁도 없이 걸어서 동네산부인과로 갔다. 늘이 노랗게 보인다더니 웬걸? 처음 진통이 시작되면서는 이만한 진통쯤은 참을 만했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진통의 맛을 대로 느끼게 해 주지 라는 듯 점심때가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진통이 시작되었다. 맨 정신으로 이런 고통을 당하다니... 허리가, 엉치가, 배가, 사정없이 뒤틀리고 내 몸의 신경세포들은 모두 창끝을 뾰족하게 갈아서 나를 찌르고 있다.


 안에 이런 험한 목소리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한 번도 질러보지 못한 괴성을 내가 지르고 있다. 정말 죽지 않을 만큼의 고문이다. 그러다가 다음 진통을 충분히 준비하라는 듯이 거짓말처럼 말끔하게 통증이 멎었다. 아프고 쉬어 주기를 여러 차례, 도무지 통증이라는 게 중간이 없다. 금방 죽을 것처럼 아프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잠시 진통이 멎은 시간조차 뒤에 몰려올 진통을 걱정하는데 써버렸다. 점점 진통의 간격은 잦아지고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언제 들어갈지 모르는 분만실을 바라보며 나보다 먼저 그곳으로 들어가는 다른 산모가 부러웠다.


그때 내 옆에서 나처럼 통을 겪고 있는 산모의 보호자인 듯 한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하는 말을 들었다. 듣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었다.


해 질 녘에 애를 낳으면  애 명이 짧다는데...,


으잉?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람. 근거 없는 말인 줄 알면서도 방금들은 그 말이 귓전에서 맴돈다. 지독한 통을 겪으면서도 자꾸만 서쪽으로 난 창문으로 눈길이 갔다.

노을이 붉다. 나는 지금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 빨리 분만실에 들어가고 싶었던  조금 전까지의 마음이 사라졌다.

창밖에 노을이 아직도 저렇게  붉은데 지금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진통을 겪으면서도 어서 빨리 창문이 어두워지기만 바랐다.

고통의 시간이 길어도 괜찮아 아가야 저 해가 질 때까지만 기다려다오.

내가 이세상에서 제일 처음 해 본 '엄마의 기도'가  제발 해 질 녘에 태어나지 말아 달라는 기도가 될 줄이야...,


스물일곱 부지 엄마가 안간힘을 쓰고 아기를 낳은 시각은 오후 7시 22분, 다행히도 9월의 해가 꼴깍 넘어간 늘한 초저녁 밤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외손주를 안고 있는 모습, 지금 내 나이쯤, 나의 엄마 모습이다

그림과 함께 그려 넣은 일기


딸아이가 열네 살 생일을 맞이한 날, 그동안 간직해  두었던 육아 일기장을 생일선물로  건네주었다.  

사춘기 소녀들이 그렇듯이 내 딸아이도 가끔은 저 사람이 우리 엄마가  맞아?라고 할 때가 종종 있었던가 보다.

세 살 터울 동생만 사랑하는 나쁜 엄마, 기대가 큰 만큼 간섭도 많은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닐지도 몰라. 한참 민감한 사춘기 소녀는 동화책 속의 주인공으로 자신을 코스프레하며 괜한 트집으로 나를 힘들게 했었다.


선물을 받은 아이가 변했다.

자신이 태어나서 돌까지 쓴 육아 일기장은  아이에게 충분히 감격적인 선물이 되고도 남았다.

엄마가 쓴 일 년간의 기록을 아이는 명작소설을 읽듯 감명 깊게  읽고 있다.


오늘은 네가 처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야로 시작된 일기는 아이가 처음으로 소리 나는 곳으로 얼굴을 돌리고 처음 뒤집기를 하고, 처음으로 앉고, 서고, 걸음마를 하는 처음의 순간들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아이가 아팠던 날 , 아이와 함께 울고 있는 새내기 엄마의 마음과. 아이와 첫 외출을 하는 날엔 아이보다 더 들뜬 철부지 엄마의 마음도 오롯이 전해주고 있다.


그 후,

아이의 노트에서 '나의 첫 번째 보물은 엄마가 쓴 육아 일기장이다 '라는 글을 보았다. 딸아이의 사춘기를 잠재운 고마운 일기장이다.


그리고 40년 후.

나는 내가 쓴 육아일기를 보며  나이 듦이 쓸쓸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 이 세상에서 엄마가 되었다는 것보다 더 나답고 품위 로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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