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쏘는 따뜻한 기억

by 연희동 김작가

쐐기에 쏘였다. 손등이 꽤 부풀었고 욱신거린다.

창가에 늘어뜨린 으름나무덩굴을 바로잡아 주려다가 요놈에게 당한 것이다. 어렸을 때 쐐기에 쏘인 기억은 있지만 이렇게 통증이 강할 줄 몰랐다. 순식간에 손등이 부어오르고 울고 싶을 만큼 욱신거렸다.

급한 대로 손을 찬물에 담갔는데 우와... 쐐기의 독침이 닿은 곳마다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이 아팠다.

모기에 물렸을 때처럼 물파스도 발라보고 연고도 발라 보았다. 아무 효과가 없이 시간이 갈수록 통증이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 민간치료법을 찾아보았더니 된장, 간장까지 출현한다.

따뜻한 물에 담그는 게 통증을 줄여준다는 글을 읽고 따뜻한 물에 손을 담갔다. 찬물보다는 좀 나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통증이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도대체 나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 쐐기란 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그놈을 잡아야만 부어오른 손등과 이 통증이 조금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우리 집 화단에는 곤충들이 많이 산다. 밤이면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만 들어도 꽤 소란스러울 정도다. 귀뚜라미도 틈새에서 한 두 마리가 울어야 서정적이지 여러 마리가 함께 울어재끼면 그것도 소음이 된다.

어제는 사마귀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들어온 적도 있고 매미는 아예 모기장에 턱 하니 발을 걸치고서 소리를 질러댄다. 가끔은 나비도 잠자리도 나방이도 한차례씩 휙 돌고 나간다. 우리 집에 곤충들이 많은 것은 약을 전혀 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곤충들은 화단에서 사랑도 하고 알도 낳고 또다시 돌아올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집 화단에 쐐기가 있는 줄 몰랐다. 나비처럼 커다란 나방이가 날아다니는 걸 본 적은 있지만 그들이 이곳에서 애벌레를 키우고 있을 줄이야...,

쐐기에 물리지만 안 했어도 내집 화단에서 무언가를 잡아 없앨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쐐기에게 쏘이고 난 뒤에야 창문 아래 떨어진 벌레의 분비물을 보았다.

꽤 많은 까만 점들이 데크 위에 가득했다. 한 놈이 아닌 게 분명하다.

비닐장갑을 껴고 살며시 으름나무 잎을 들춰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쐐기는 없다.

그때 나뭇잎 뒤에 숨어있는 연두색 애벌레를 발견했다. 나뭇잎과 똑같은 연두색으로 보호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몰랐던 것이다.

한놈이 눈에 띄자 그 후로는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제법 많은 쐐기들이 그곳에 숨어 있었다.

쐐기가 붙은 잎을 따서 비닐속에 담아서 버렸다.

조금 전까지 독침으로 인간에게 대항하던 것들이 아무런 힘없이 사라졌다.


보기에 따라서는 예뻐 보일 수도 있는 쐐기들


쐐기 몇 마리를 잡아내고 아직도 욱신거리는 손등을 바라보다가 어렸을 적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 집 뒤꼍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다. 두레박으로 한참을 길어 올려야 하는 그 물은 우리 식구뿐만이 아니라 우리 이웃들의 유일한 식수였다.

우리 옆집은 아예 울타리를 터서 수시로 우물가를 드나들 수 있게 만들었다.


옆집 딸들은 모두 미모가 출중했다. 그중에서도 큰딸인 선자 언니가 제일 예뻤다.

딸들이 많은 옆집 아이들은 소꿉놀이도 인형놀이도 연극도 참 재미있게 했다. 위로 네 명이나 있는 오빠들과 주로 뛰고 달리며 힘을 쓰는 놀이를 하는 나와 달리 그들은 주로 입으로 조잘거리면서 놀았다. 나도 그 틈에 끼어서 함께 어울려 놀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 언니에게 잘 보여야 했다. 언니가 우물가에 나오면 두레박 가득 물을 길어서 대야에 듬뿍 부어 주고는 했다. 아침이면 세수를 하러 우물가로 나오는 옆집 언니를 기다렸다가 대야에 물을 길어 부어주는 심부름꾼 노릇이 즐거웠다.


그날도 나는 우윳빛깔 돋는 뽀얀 얼굴의 옆집 언니에게 힘들게 길어 올린 물을 세숫대야 가득 부어주었다.

그런데 다른 날과 달리 나를 힐끔 바라보던 옆집 언니가 그냥 바닥에 물을 쏟아버리더니 휑하니 자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멍하니 서있는 내 곁으로 엄마가 다가오셨다.

엄마는 나를 곁에 앉히고 얼굴을 씻겨주었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쓱 문지르고 내 코를 힘껏 쥐더니 코를 풀라고 했다. 코를 풀었는지 슬픔을 뿜어냈는지 뭔가 내 안에 있는 것을 힘껏 뱉어냈다.


''쐐기 같은 지지배. 다시는 그것들 하고 놀지 말어. 네가 뭐가 아쉬어서...''


엄마는 아까부터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 것은 이 샘물의 주인집 딸임을 각인 시켜주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마터면 울 뻔했다. 내 편을 들어주는 엄마의 말도, 넓은 엄마의 손바닥도 너무나 따뜻했다. 그 촉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순간의 내 맘을 너무나 잘 알아주는 엄마의 한 마디, ''쐐기 같은 지지배''라는 말이 억울함과 서러움을 한방에 날려 주었다.

쐐기는 그동안 내가 옆집 언니한테 느꼈던 감정을 한마디로 함축하는 말이기도 했다


옆집 언니는 미인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했다. 그 후에 서울의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다. 하얀 버버리 코트를 입고 서울로 가는 언니를 읍내 터미널 앞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다.

이제 예쁜 할머니가 되었을 그 언니가 보고싶다.

아직도 욱신거리는 따뜻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