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아파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내가 처음 아파트에 입주할 때만 해도 나는 집값보다 아래층에 누가 살고 있는지를 염려해야 했다. 한창 뛰어놀고 싶은 두 살 터울의 어린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골에 사는 우리 어머니는 아파트가 싫다고 했다. 똑같은 구조로 지어진 아파트를 보면서 대뜸 '닭장 같은 집'이라며 하대했다. 그동안 아껴 쓰며 모은 돈과 20년 만기 융자금을 합쳐 변두리에 13평짜리 아파트를 처음 내 집으로 마련하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나는 어머니의 시큰둥한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결혼해서 6년 동안 이사를 세 번이나 다니다가 겨우 마련한 아파트인데...,
처음 신혼집을 꾸린 곳은 화곡동에 있는 단독 주택의 한 칸짜리 방이었다. 부엌은 따로 있었으나 화장실은 주인네와 함께 사용하는 구조였다. 단칸방에 신접살림을 꾸며 주고 가면서 어머니는 나에게 은밀하게 말했다. “신혼 때는 이게 좋아야, 집이 넓으면 니 시집 식구들이나 들락거릴 테고 방이 좁으면 부부싸움을 해도 쉽게 화해하고 좋지 뭐” 고향집에는 남아나는 게 방인데 서울 한 구석에 단칸방을 얻어 살림을 시작하는 딸이 안돼 보였던지 어머니로서는 굉장히 어렵게 생각해 낸 위안의 말이었다.
2년 후에 산처럼 부푼 배를 안고 내발산동의 반지하 주택을 얻어서 이사를 갔다. 대문에서 정원을 통해 두 계단 내려가면 커다란 두 개의 방이 있는 집이다. 부동산 아저씨가 권해 주는 대로 단독주택의 일층이라는 말만 믿고 반지하라는 개념도 모른 채 태어날 아기에게 방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부푼 희망으로 방을 계약했다. 이삿짐을 날라주러 오신 아버지는
“방에서 테니스를 해도 되겠다”라고 하시며 절반이 땅 속에 묻혀있는 깊이는 외면하고 전 보다 두배로 넓어진 넓이만 강조하며 자꾸만 뒤 돌아보시며 내려가셨다.
같은 동네의 연립주택에 집이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연탄을 사용하는 부엌이 아닌 가스레인지를 켤 수 있는 싱크대가 있는 주방과 따뜻한 물이 나오는 욕조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새로 집을 산 집주인은 전세를 낼 요량으로 집을 구했으나 정작 전세를 주고 나면 자신들이 살 집이 없는 나보다 더 가난한 입주자였다. 집 전체를 우리가 사용하되 문간방 하나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조건으로 우리는 집주인과 동거를 시작했다.
순박하고 착한 집주인과는 별 탈이 없이 지내는데 문제는 이제 세 살이 되어 네 것 내 것을 유난히 따지는 딸아이와 다섯 살짜리 주인 아들의 논쟁이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집이야”
“아니야 내 집이야”
어느 날은 현관 출입문에 커다랗게 ‘우리 집, 이라는 글씨가 써져 있었다. 주인집 아들이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비뚤비둘한 글씨로 아예 자기 집을 공고히 해 둔 것이다.
모자공장을 운영하던 집주인도 형편이 풀렸고 나도 드디어 내 집을 갖게 되었다.
아파트에 입주하는 날, 어머니는 늙은 호박을 푸짐하게 넣은 찰시루떡을 만들어 오셨다. 그리곤 접시에 떡을 담아 맨 먼저 관리실부터 갖다 날랐다. 관리실에 떡을 상납한 것은 다른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파트에서 가장 맘에 들지 않는 것은 화장실, 어머니 말로는 ‘똥 간,이었다. 가족들이 모여있는 거실과 가까운 곳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하기가 여간 거북스러운 게 아니라며 아무리 급해도 1층에 있는 관리실 화장실을 애용하셨다. 시골 친정집의 푸세식 변소 거리에 비하면 볼 일의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이곳 관리실 화장실의 거리는 어머니에게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아파트는 닭장 같아서 싫다던 말과 달리 어머니는 이사 온 후, 나보다 더 새 집을 좋아하셨다. 손에서 걸레를 놓지 않고 부지런하게 이 방 저 방을 다니며 청소를 하신다.
새집이라 먼지도 없건만 시골에서부터 사 들고 온 갈빗자루로 먼지를 쓸어서 버리지 않고 봉투에 모으셨다. 복을 담는 어머니만의 의식이다. 이사 올 때도 마찬가지지만 새집으로 이사를 온 뒤에도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빗자루로 소복이 쓸어서 담아 두셨다.
방 두 개에 작은 거실, 화장실과 부엌, 네 식구가 살기엔 더없이 좋은 평수라고 극찬을 하시던 어머니가 우리보다 베란다가 넓은 다른 동을 보시고는 “쪼금만 살다가 저리로 가면 되겠네” 라며 속 마음을 드러 내셨다. 봉투에 쓰레기를 담아 모을 때마다 어머니의 소망도 함께 담아 두셨던 듯하다.
새 집을 좋아하는 건 어른들 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기쁨을 온몸으로 나타낸다. 새로 들여놓은 2층 침대가 문제였다. 큰 아이는 침대에서 아예 아래로 곤두박질을 치며 내려오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아래층에 사는 노부부가 걱정되었다. 우리 아래층에는 점잖은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드디어 염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아래층 할머니가 초인종을 누르고 찾아왔다. 할아버지가 소리에 민감하시니 주의를 바란다는 통고를 하러 온 것이다. 아이들이 뛸 때마다 아래층 노인들을 걱정하면 아이들이 뛰면서 크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제 자식 다치지 않았는지부터 챙기지 않는 나를 원망하던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아닌 게 아니라 어머니는 뜬금없이 방 안에서 갈빗자루를 들고 나타나셨다.
“ 우리 딸이 멀쩡한 청소기를 두고도 아래층에 울린다고 이 빗자루를 쓰고 있네요 아이들이 어려서 조심을 시켜도 그때뿐이군요 서로 이해하면서 살아야지 어쩌겠어요 "
서울 할머니하고 대화를 나눌 때 우리 어머니는 절대로 전라도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청소기를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갈빗 자루를 신봉하는 어머니셨다. 갈빗자루가 언제부터 층간소음 방지용으로 둔갑하였는지 시골 할머니의 순발력이 서울 할머니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닭장 같은 아파트에서 소리조차 죽이고 살아야 하는 게 싫었던지 다음 날 어머니는 똥 간 넓은 시골집으로 내려가셨다.
내가 오랫동안 살던 아파트를 떠나 지금의 단독 주택으로 이사를 왔을 때 어머니가 제일 많이 생각났다.
누구보다도 좋아 하셨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