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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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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Jan 24. 2021

이제는 잊지 않을게


정말 이렇게도 감쪽같이 까먹을 수가 있을까?

치매와 건망증은 잊고 난 후, 기억의 재생 여부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한다. 뒤늦게야 잊힌 약속이 생각났으니 다행히 치매는 아니지만 하마터면 소중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뻔했다.


토요일 아침, 여느 때와 같이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매일 아침이면 일어나자마자 오늘 할 일부터 점검하던 예전의 습관이 코로나 이후로 사라졌다.

일 년 동안 집 안에서만 지내다 보니 계획 없는 날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은 확진자가 어제보다 늘었는지 줄었는지만 궁금할 뿐, 오늘의 날짜조차 모르고 지나갈 때가 대부분이다.


요즈음에는 날씨도 종잡을 수가 없다. 이틀 전만 해도 영하로 치닫던 날씨였는데 오늘은 봄날의 날씨처럼 푸근하다. 거실 가득 햇살이 쏟아졌다.


''우리  오늘 라이딩이나 나갈까?''


하루 중 기온이 높은 오후 1시, 가벼운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집을 출발했다.


                       눈앞에 펼쳐진 한강변의 아름다운 경치들


얼음이 녹고 있는 샛강에는 청둥오리들이 헤엄치고 있다. 이대로 봄이 오면 좋겠다. 금빛 갈대 무리가 판을 이루고 있는 한강변에는 이른 봄 날씨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평소라면 한강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을 텐데 오늘은 사람들이 조금 덜한 행주산성 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같은 한강변이라고 해도 양쪽의 방향은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도심 속 쉼터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남쪽 강변과 달리 북쪽 강변은 좀 더 탁 트이고 자연스럽다고 할까? 나는 넓은 갈대밭이 펼쳐져있는 북쪽 방향을 선호하는 편이다.

오늘은 조금 멀리, 지금껏 가보지 않은 곳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달려보기로 했다. 


방화대교의 붉은 교각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인천공항으로 가려면 언제나 그 다리를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라이딩으로 여행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지만 머지않아 코로나 종결 소식이 들리면 나는 저 다리 위를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타고 건너면서 그 아래 갈대 무성한 이 길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지금 이 시간이 결코 태평하게 경치나 감상할 시간이 아니었다는 걸...


집에서부터 20km쯤 달렸을까? 길 옆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고 일어서서 다시 라이딩을 시작하려는데 뭔가 뒷덜미를 낚아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까? 이 느낌은....


그때야 비로소 생각이 났다. 오늘은  외손녀가 성당에서 첫 영성체 예식을 하는 날이다.

이틀 전, 손녀가 전화를 했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여러 차례 미루었던 첫 영성체 예식을 드디어 이번 주에 하기로 했다고 한다.

가톨릭 신자인 우리 가족에게 손녀의 첫 영성체는 참 의미 있는 날이었다.


''할머니 꼭 오셔야 해요''

''그럼 예쁜 꽃바구니 들고 갈게''


지금 이 시간은 라이딩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손녀를 축하해주기 위해 성당으로 갔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날씨의 꼬임에 빠진 것이다.


시간을 보니 두시 사십 분,

모든 의식에 인원이 제한되어 성당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축하객들은 영성체 예식과 미사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성당 앞마당에서 축하를 해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약속시간 20분 전에 집에서 20km  떨어진 에서 오늘의 약속이 생각나다니..., 이미 시간은 늦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약속 장소까지 가야만 한다.


지금까지 진양조로 경치를 즐기며 라이딩을 했다면 이제부터는 자진모리다.

전기자전거 모터의 동력 단수를 가장 높게 올렸다. 

우리는 왔던 길로 되돌아 달렸다.


비껴주세요 제가 지금 바쁘답니다. 추월해도 이해해 주시겠지요? 아마 지금쯤 식이 끝났을 거예요, 우리 손녀가 오늘 첫 영성체를 하거든요. 이런 망할...  건망증 같으니라고.... 아니야 이제라도 생각났으니 다행이지, 뭐든 핸드폰에 꼭꼭 저장하고 기억하던 당신은 오늘은 왜 잊고 있었던 거야  남편을 원망할 자격도 없지만  탓할 시간도 아깝다. 달려라 달려...,

금 뭐가 휙 하고 지나갔지?라고 하실 거예요, 맞아요 저는 지금 날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한강변을 지나고 샛강을 지나 드디어 큰 길가로 접어들었다.

여보 당신은 바로 집으로 가서 준비하고 있어요, 나는 꽃집에 들러 꽃을 사 가지고 갈게요

옷은 뭘 입지? 정장....,

우리의 자전거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스칠 때마다  남편이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알려주었다. 어떻게든지 시간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시각 세시 삼십 분  드디어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엄마 어디 계세요?)

이제 미사가 끝난 모양이다.

그 시간에 나는 꽃을 주문하고 있었다.

시간을 벌 요량으로 짧은 문자를 보냈다.

(다 왔어 방 갈게)

분홍 아기 장미로 꽂아주세요, 저 바구니가 좋겠군요, 제가 서두는 것 이해해 주세요. 그럴 일이 있었거든요 집에 가서 옷 갈아 입고 올 동안 예쁘게  만들어 주세요


 앞에 도착, 남편은 그새 정장으로 옷을 갈아 입고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멧을 벗고 모자를 썼다. 점퍼를 벗고 코트를 입었다. 운동화를 벗고 부츠를 신었다. 거울 볼 시간도 없다. 중국 마술사의 변검도 이보다는 빠르지 않을 것이다

집이 가까우신가 봐요, 꽃바구니에 리본으로 마무리 장식을 하면서 꽃집 주인이 말한다.


드디어 성당 도착,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간 성당 앞마당에 딸네 가족이 웃고 있다.

''어서  미안해''

''괜찮아요 아까는 사람들이 많아서 성모상 앞에서 사진 찍기도 힘들었어요''


오늘따라 날씨는 왜 그렇게 따뜻하고  늦게 도착한 할머니를 괜찮다며 토닥여 주는 우리 손녀 목소리는 왜 그렇게 부드러운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니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솟는다.


 시간 전. 갑자기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게 되었고 지금 내가 아이 앞에서 꽃을 들고 웃고 서 있는 게 마치 꿈속처럼 느껴진다.


오늘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아이를 위해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도와준 것만 같다.


첫 영성체: 영성체란 신자 공동체가 미사 때 축성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일입니다. 첫 영성체는 세례를 받은 뒤 처음으로 하는 영성체 또는 그 의식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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