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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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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Jan 07. 2021

눈 강아지


밖에 눈이 오는데?

언젠가 내린 첫눈처럼 조금 감질나게 내리다가 그칠 줄 알았다.


눈이 온다. 하얗게 펑펑 쏟아진다.

거실 창밖으로 금세 소복이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눈 감상에 빠져있다.

김장을 마치고 창고에 연탄을 가득 넣어두고 난 뒤에 눈이라도 내리처럼 좋아하셨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눈이 좋은 게 아니라 눈이 와도 걱정 없는 겨울 살림살이가 안심되었던 것이다.


그런 어머니와 달리 나는 그냥 눈이 좋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고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속에서 뒹굴며 놀았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얼음을 보면 지치고 싶고 눈을 보면 뭉쳐보고 싶다.


초 저녁부터 눈이 제법 쌓이고 있다.

며칠 전 친정오빠는 눈이 하얗게 쌓인 친정집을 사진으로 보여 주면서

''여긴 눈이 이렇게 많이 와야'' 라며 새해 덕담과 함께 눈 소식을 보내 주었다.


어린 시절 우리의 겨울은 테마공원보다도 더 즐거웠다.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두 줄로 난 눈길을 지치고 내려오는 미끄럼은 타본 사람만이 느끼는 스릴 있는 미끄럼틀이었다. 손등이 트고 콧물이 얼어붙어도 지치지 않고 밖에서 뛰어놀았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언발을 녹이라며 밖에서 놀고 들어 온 우리에게 가짓대를 삶은 따뜻한 물을 대야에 담아 주곤 하셨다.

빨리 겨울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어른들과 달리 들로 산으로 다니며 지칠 줄 모르고 놀았던 우리의 세상은 그야말로 겨울왕국이었다.


어린 시절과 비슷하게 눈이 많이 오는 오늘 같은 날에는 나는 아이가 된다. 동심으로 돌아가서 눈을 만지고 놀고 싶다. 눈 속에서 뛰어놀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아챈 듯이 때맞춰 대문의 종소리가 울리고 손녀가 나타났다.

의기투합,

언젠가 사 둔 플라스틱 썰매를 들고 동네 언덕 위로 나갔다.

순식간에 하얀 눈썰매장이 되어 버린 언덕에서 아이가 눈썰매를 타고 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와 좋지만 소리를 지를 수 없는 어른이 눈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저 길 아래에서는 갑자기 내린 눈으로 찻길이 밀려 우왕좌왕 어수선해져서 차를 버리고 힘들게 걸어온다며 큰길가 소식을 이웃이 전해준다.


(무슨 어른이 저래? 폭설로 인해 퇴근길 사람들이 발이 묶이고  거리의 차들은 눈길에 사고 위험이 있다는데 한가하게 아이하고 눈썰매를 타는 어른이라니...,)


(넓은 서울 한구석에 언덕길 하나 치우지 않았다고 무슨 대수람..,)


두 마음이 서로 대립하지만 나는 지금 다른 세상에 있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깐, 곧이어 집집마다 대문이 열리고 자신들의 집 앞 눈을 치우는 사람들로 골목이 소란스러워졌다.

방금까지 아이의 즐거운 놀이터였던 언덕길에 염화칼슘이 뿌려졌고 나는 어린 시절 길 앞에 연탄재를 굴리던 어른들이 미웠던 것처럼 너무 일찍 서둘러 눈을 쓸어내는 이웃이 야속했다.


                            잠깐 사이 눈썰매장이 된 골목길과 우리가 만든 눈 강아지


아직도 신이 나있는 아이와 함께 눈을 굴렸다. 혼자서도 하고 싶었던 일인데 아이가 하자고 하니 즐거울 수밖에,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이의 부모는 집 안에서 웅크리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데 남편과 나는 손녀와 함께 눈을 굴리고 있다.

눈 사람 말고 눈 강아지를 만들자고 한다  우리가 눈 속에서 강아지처럼 뛰어놀았으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 대문 옆에서 커다란 강아지를 한 마리 었다.

편은 계속 눈을 퍼다 주었고 나와 아이는 한 마리 눈 강아지를 멋지게  만들었다.


철이 덜 든 사람들을 철부지라고 한다. 눈이 오면 나는 철부지가 된다. 눈처럼 어른의 위엄이 녹아내리는 걸 어쩌라고...,

딸아이가 손녀에게 이제 그만 놀고 집에 가자고 채근한다.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굳이 데리고 갔다.


함께 놀던 친구는 신데렐라처럼 떠나버리고 대문 옆에는 신데렐라가 남기고 간 유리구두처럼 눈 강아지 하나가 우두커니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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