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붉은 지붕

막걸리에 반하다

by 연희동 김작가

어제 집으로 택배가 한 상자 도착했다. 아들이 보낸 것이다. 도무지 언박싱을 하기 전에는 안에 있는 게 뭔지 추측할 수 없는 묵직한 물건이었다.

박스를 열자 안에는 하얀 스티로폼 상자가 들어 있고 **도가라는 상호와 함께 영하 10도 c 이하 냉장보관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뭔데 이렇게 정성스럽게 포장을 했지? 라며 스티로폼 박스를 열었다.

굉장히 큰 기대를 했었나 보다. 약간은 실망했다. 스티로폼 박스 안에서 나타난 것은 막걸리였다. 뒤늦게 술의 세계에 입문하였노라는 내 글을 읽은 것일까?

기다란 와인병에 담긴 막걸리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모두 세 병이었다.


소박한 막걸리를 참 정성스럽게 포장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나는 막걸리를 함부로 여겼던 것이다.

소주와 함께 서민들과 가장 가까운 술이 막걸리가 아니었나? 그런 막걸리가 갑자기 멋스러운 와인병에 담겨 있었으니 낯설 수밖에...,


박스 안에 상품과 함께 동봉된 책자 한 권이 있었다.

이 술은 손으로 직접 빚은 생막걸리이며 전통방식만을 고수하여 빚은 술이라고 적혀있다. 책자에는 그 밖에도 술이 빚어지는 과정과 술을 다양하게 즐기는 방법까지 자세한 설명이 곁들어 있었다. 막걸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장인의 정신이 느껴졌다.

책자에 적힌 설명을 읽고 나니 조금 전 멋모르고 함부로 여긴 막걸리에게 조금 미안했다.

막걸리는 우리 토속주가 아니던가 우리 것을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인 내가 우리 것을 푸대접하다니..,


내가 지금껏 알고 있었던 막걸리는 농사철에 논두렁에서 새참으로 마시던 농주였고, 주전자 가득 아버지의 술 심부름을 하면서 찔끔찔끔 마시다가 취해버린 내 인생의 첫 이었다.

어린 시절, 아저씨들이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은 옆에서 바라만 봐도 배가 불렀다.

막걸리는 조금은 찌그러진 양은 대접에 따라 마셔야 더 어울렸다. 새끼손가락을 술잔에 집어넣어 마치 마법을 걸 듯 두어 번 돌려준 뒤 목젖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꿀꺽꿀꺽 소리 내어 삼키고 나면 아저씨의 콧수염에는 막걸리 방울이 오송송 맺혀있었다. 콧등을 찡긋하며 내는 ''크으''소리와 함께 손등으로 한번 쓰윽 문질러주어야 막걸리를 제대로 마시는 것 같았다.


막걸리의 어원은 마구 거른 술에서 나왔다고 한다.

과일을 발효시켜 만든 게 와인이라면 막걸리는 곡물을 발효시켜서 만든 우리나라 전통주다.

술이 익으면 맑은술이 위에 뜨는데 맑은술은 걸러내어 청주가 되고 나머지는 섞어서 막걸리를 만든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는 명절이면 집에서 직접 술을 빚어 조상께 올리셨다. 잘 지은 고두밥에 누룩을 버무려서 맑은 물을 넣고 숨 쉬는 항아리에 넣어 술을 담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껏 내가 알고 있는 소박한 막걸리와 달리 오늘의 생막걸리는 막걸님이라는 명칭이 어울릴 듯싶다.

막걸님을 마시기 전에 안주를 장만했다. 왠지 평소처럼 김치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소개된 책자에는 목이 기다란 유리잔에 따라놓은 막걸리와 과일안주를 곁들인 사진이 있었다.

냉장고에 있는 몇 개의 과일을 꺼내 안주를 만들었다.


그때까지 몰랐다. 막걸리가 이렇게 우아하고 품위 있는 술이라는 걸..,

꿀꺽꿀꺽 마시는 술이 아니라 홀짝홀짝 음미하며 마시게 되더라는 걸...,


아끼는 도기 잔에 생막걸리를 따랐다.

술이 살아있다. 잔 안에서 뽀글뽀글 막걸리의 기포가 터지고 있었다. 막걸리의 숨소리를 느끼며 처음 술이 입술에 닿았을 때의 느낌이 산뜻했다.

청량한 기운이 입안에서 톡 쏘더니 이내 목 언저리에서는 구수한 누룩의 향이 번졌다. 지금까지 어디서도 먹어본 적이 없는 막걸리의 맛이었다. 마치 샴페인을 마시듯 즐거운 마음이다. 막걸리가 이런 맛도 품고 있었구나

막걸리의 새로운 변신이다.

멋과 맛을 다 품은 막걸리


지금까지 내가 마셔본 와인 중에 가장 기억나는 와인은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성에 들렀을 때 샀던 와인이다.

그곳 성 안에서 가톨릭 수사님들이 직접 만든 와인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었던 거로 기억된다.

몇 년 전 남프랑스 보르도를 여행 했을 때 드넓은 포도밭과 중세의 집을 꾸며서 만든 와이너리에서의 와인 체험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진정한 와인맛도 또 다른 술맛도 모르고 단지 마시고 난 뒤에 머리만 아프지 않으면 좋은 술로 인정하는 내가 술맛을 논하기에는 많이 어설프지만 오늘 내가 마신 막걸리도 그때 마셔 본 와인 못지않았다.


외국의 와인농장은 여행중에 몇 번 가봤지만 정작 우리나라의 양조장은 가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품위 있는 막걸리 와인이 있고 우리 것을 고급화하여 만드는 장인들이 있는데 어찌 몰랐을까?

막걸리를 빚는 양조장이 있는 곳은 울산 언양의 한 농촌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누룩을 빚고 디디여서 만든다고 하니 여행의 기회가 생기면 한번 들러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와인은 그 술이 고급지든 헐하든 마시는 방법과 모양이 같지만 막걸리는 향유하는 분위기가 서로 다른 것도 매력 중 하나다.

생막걸리는 그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마셔야 할 것 같고 탁주는 상 바닥에 흘리고 마셔도 흉이되지 않고 소리를 내어 마셔도 전혀 허물이 없는 소박한 술이다.


막걸리가 좋다. 투박함과 소탈함 거기에 부드러움과 고급스러움까지 갖추었으니 네가 친구였다면 내가 원하는 조건은 다 갖추고 있는 셈이다.


맛과 멋을 품은 술, 막걸리에게 오늘 나는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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