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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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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Mar 22. 2021

막걸리에 반하다

어제 집으로 택배가 한 상자 도착했다. 아들이 보낸 것이다. 도무지 언박싱을 하기 전에는 안에 있는  뭔지 추측할 수 없는 묵직한 물건이었다.

박스를 열자 안에는 하얀 스티로폼 상자가 들어 있고 **도가라는 상호와 함께 영하 10도 c 이하 냉장보관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뭔데 이렇게 정성스럽게 포장을 했지? 라며 스티로폼 박스를 열었다.

굉장히 큰 기대를 했었나 보다. 약간은 실망했다. 스티로폼 박스 안에서 나타난 것은 막걸리였다. 뒤늦게 술의 세계에 입문하였노라는 내 글을 읽은 것일까?

기다란 와인병에 담긴 막걸리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모두 세 병이었다.


소박한 막걸리를 정성스럽게 포장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나는 막걸리를 함부로 여겼던 것이다.

소주와 함께 서민들과 가장 가까운 술이 막걸리가 아니었나? 그런 막걸리가 갑자기 멋스러운 와인병에 담겨 있었으니 낯설 수밖에...,


박스 안에 상품과 함께 동봉된 책자 한 권이 있었다.

이 술은 손으로 직접 빚은 생막걸리이며 전통방식만을 고수하여 빚은 술이라고 적혀있다. 책자에는 그 밖에도 술이 빚어지는 과정과 술을 다양하게 즐기는 방법까지 자세한 설명이 곁들어 있었다. 걸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장인의 정신이 느껴졌다.

책자에 적힌 설명을 읽고 나니 조금 전 멋모르고 부로 여긴 막걸리에게 조금 미안했다.

막걸리는 우리 토속주가 아니던가 우리 것을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인 내가 우리 것을 푸대접하다니..,


내가 지금껏 알고 있었던 막걸리는 농사철에 논두렁에서 새참으로 마시던 농주였고, 주전자 가득 아버지의 술 심부름을 하면서 찔끔찔끔 마시다가 취해버린 내 인생의 이었다.

 

어린 시절, 아저씨들이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은 옆에서 바라만 봐도 배가 불렀다.

막걸리는 조금은 찌그러진 양은 대접에 따라 마셔야 어울렸다. 새끼손가락을 술잔에 집어넣어 마치 마법을 걸 듯 두어 번 돌려준 뒤 목젖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꿀꺽꿀꺽 소리 내어 삼키고 나면 아저씨의 콧수염에는 막걸리 방울이 오송송 맺혀있었다. 콧등을 찡긋하며 내는 ''크으''소리와 함께 손등으로 한번 쓰윽 문질러주어야  막걸리를 제대로 마시는 것 같았다.


막걸리의 어원은 마구 거른 술에서 나왔다고 한다.

과일을 발효시켜 만든 게 와인이라면 막걸리는 곡물을 발효시켜서 만든 우리나라 전통주다.

술이 익으면 맑은술이 위에 뜨는데 맑은술은 걸러내어 청주가 되고 나머지는 섞어서 막걸리를 만든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는 명절이면 집에서 직접 술을 빚어 조상께 올리셨다. 잘 지은 고두밥에 누룩을 버무려서 맑은 물을 넣고 숨 쉬는 항아리에 넣어 술을 담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껏 내가 알고 있는 소박한 막걸리와 달리 오늘의 생막걸리는 막걸님이라는 명칭이 어울릴 듯싶다.

막걸님을 마시기 전에 안주를 장만했다. 왠지 평소처럼 김치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소개된 책자에는 목이 기다란 유리잔에 따라놓은 막걸리와 과일안주를 곁들인 사진이 있었다.

냉장고에 있는 몇 개의 과일을 꺼내 안주를 만들었다.


그때까지 몰랐다. 막걸리가 이렇게 우아하고 품위 있는 술이라는 ..,

꿀꺽꿀꺽 마시는 술이 아니라 홀짝홀짝 음미하며 마시게 되더라는 걸...,


아끼는 도기 잔에 생막걸리를 따랐다.

술이 살아있다. 잔 안에서 뽀글뽀글 막걸리의 기포가 터지고 있었다. 막걸리의 숨소리를 느끼며 처음 술이 입술에 닿았을 때의 느낌이 산뜻했다. 

청량한 기운이 입안에서 톡 쏘더니 이내 목 언저리에서는 구수한 누룩의 향이 번졌다. 지금까지 어디서도 먹어본 적이 없는 막걸리의 맛이었다. 마치 샴페인을 마시듯 즐거운 마음이다. 막걸리가 이런 맛도 품고 있었구나

막걸리의 새로운 변신이다.

멋과 맛을 다 품은 막걸리


지금까지 내가 마셔본 와인 중에 가장 기억나는 와인은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성에 들렀을 때 샀던 와인이다.

그곳 성 안에서 가톨릭 수사님들이 직접 만든 와인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었던 거로 기억된다.

몇 년 전 남프랑스 보르도를 여행 했을 때 드넓은 포도밭과 중세의 집을 꾸며서 만든 와이너리에서의 와인 체험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진정한 와인맛도 또 다른 술맛도 모르고 단지 마시고 난 뒤에 머리만 아프지 않으면 좋은 술로 인정하는 내가 술맛을 논하기에는 많이 어설프지만 오늘 내가 마신 막걸리도 그때 마셔 본 와인 못지않았다.


외국의 와인농장은 여행중에 몇 번 가봤지만 정작 우리나라의 양조장은 가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품위 있는 막걸리 와인이 있고 우리 것을 고급화하여 만드는 장인들이 있는데 몰랐을까?

막걸리를 빚는 양조장이 있는 곳은 울산 언양의 농촌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누룩을 빚고 디디여서 만든다고 하니 여행의 기회가 생기면 한번 들러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와인은 그 술이 고급지든 헐하든 마시는 방법과 모양이 같지만 막걸리는 향유하는 분위기가 서로 다른 것도 매력 중 하나다.

생막걸리는 그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마셔야 할 것 같고 탁주는 상 바닥에 흘리고 마셔도 흉이되지 않고 소리를 내어 마셔도 전혀 허물이 없는 소박한 술이다.


막걸리가 좋다. 투박함과 소탈함 거기에 부드러움과 고급스러움까지 갖추었으니 네가 친구였다면 내가 원하는 조건은 다 갖추고 있는 셈이다. 


맛과 멋을 품은 술, 막걸리에게 오늘 나는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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