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은 너를 잃은 것이다

by 연희동 김작가

니스의 민박집에 있는 일주일 동안에 어느덧 나는 곳에서 가장 오래 머문 여행자가 되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에서는 손님들 역시 모두 한국에서 온 여행자들이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은 누구나 한 솥밥을 먹는 식구가 된다.


아침이면 정해진 시간에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하며 자신들이 다녀온 곳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여행 중에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한다.


민박집의 아침식사 시간은 정보 교환장소이기도 했다. 새로운 여행지의 루트를 알려주기도 하고 주변 맛집과 공연장소, 축제에 관한 정보 등 굵직한 소식이 있는 반면 어느 곳은 가봤더니 별거 없더라, 같은 물건인 데도 어디가 더 저렴하더라는 깨알 같은 정보들도 쓸만하다, 하지만 대화가 끊기거나 서먹한 공기가 흐를 때도 있다. 이럴 땐 대부분 민박집에 가장 오래 머문 사람이 대화를 이끈다,


여행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이곳에 오기 전에 들른 곳은 어디인지 며칠 동안 있을 예정인지를 묻는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무르익으면 직업과 나이 등 개인 신상까지 서로 알게 된다. 여행지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도 이곳에서는 스스럼없이 하게 된다. 나이 성별 직업을 개의지 않고 모두 허심탄회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이곳은 누구에게나 낯선 곳이고 시간이 지나면 각자의 길로 떠나야 하는 나그네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연이든 훌훌 털고 나서 떠나면 그만이다.


오늘 아침 식탁에는 한 명의 여행객이 새로 왔다. 스물한 살, 앳된 여학생이다. 민박집에서 가장 어린 친구다. 학교를 휴학하고 여행을 시작했는데 출발할 때는 친구와 둘이었지만 여행 도중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다가 친구는 중간에 귀국해버리고 지금은 혼자서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 하루나 이틀 정도 있다가 떠나는 여행객이지만 아침 밥상머리에서는 그들의 고민과 취향 앞으로의 진로까지 다 털어놓게 된다. 친구는 자신의 고민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오늘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다는 여학생이 밤에 거실에서 혼자 와인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무척 외로워 보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참 많은 일을 겪는다. 그중에 하나가 일행과 의견이 맞지 않아 마음이 상하는 일이다. 나도 여행 중간에 남편과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참으며 속앓이 하기보다 싸우면서 뱉은 말들로 상대방의 생각을 더 많이 알게 되면서 이후로는 크게 마음 상하지 않고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민박집 사장님은 지금껏 자신의 집에 머문 여행자 중에 우리가 가장 나이가 많은 손님이라고 했다. 젊은 여행객들도 이곳에서 자신의 부모님과 같은 연배의 어른을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 어른들은 자유여행을 두려워하고 혹시 자유여행을 한다고 해도 호텔에 묵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꽃보다 할배'가 이서진을 따라다니지 않고 우리처럼 몸으로 부딪히는 여행을 했더라면 우리 부부 같은 여행객이 많아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지고 온 김치와 골뱅이로 안주를 만들어 술자리를 준비했다. 주인장은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고 뒤늦게 귀가한 또 다른 여행객은 맥주를 가져왔다.

근사한 만찬상이 차려졌다.

처음엔 친구와 헤어지고 속상해하는 막내 여행객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한 자리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일 이곳을 떠나 마르세유로 가는 우리 부부를 위한 이별파티가 되고 있다. 몇 번의 술잔이 오가면서 나를 부르는 '어머니'라는 호칭이 편안하게 들렸다.


우리들의 만찬상



막내는 아직도 우울하다. 헤어진 친구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만난 사이였고 휴학을 하고 있는 지금 함께 여행을 하면서 더 돈독한 관계를 가지려고 하였는데 헤어지게 되었으니 뭔가 인생에서 크게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계속 상처를 안고 살아갈 젊은이에게 도움이 되어 줄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여행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유익한 활동이다. 체험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학습이기도 하다.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 외에 문화와 환경이 다른 낯선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툴툴 털고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내가 된다. 그래서 여행 중에는 서로의 모습을 더 빨리 자세히 알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이 친구도 그동안 알고 있었던 모습과 다른 친구의 모습을 보게 됐는지 모른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경험이 많다는 것이다. 나라고 왜 그런 상처가 없었겠는가 이곳에 오기 바로 몇 개월 전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10여 년의 우정을 쌓았던 친구부부와 함께 캐나다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여행을 다녀 온 뒤 한 사람이 갑자기 단체 카톡방에서 나가버렸다.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유도 모른 채 시간이 흘렀다. 세 부부가 함께 간 패키지여행이었기 때문에 서로 의견이 부딪힐 일도 없었다.

그동안 쌓은 우정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을 만들 만큼 마음을 다칠 일이 도대체 뭘까? 적어도 그 이유는 알려줘야 했다.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한참 후 길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막내 여행객은 자신과 비슷한 나의 경험을 통해 결론을 알고 싶은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라면 쉽사리 혼자서 결정을 내리고 관계를 무산시키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함께 지낸 세월을 무시하고 즉흥적인 감정으로 친구를 외면하는 사람은 지금이 아닌 언제라도 네 곁을 떠날 것이다. 그는 단지 친구를 유희의 짝으로 알았을 뿐 진정한 벗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고? 굳은 땅에서는 싹이 자라지 않는다. 금이 간 항아리는 붙인다고 새 것이 될 수 없다. 나의 지론은 그렇다

내 시대의 어른들이었다면 이럴 때 친구와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친구는 많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만나지 않은 것보다 낫다'. 철학자 파울로의 이별 철학이다.

헤어지는 것도 어쩌면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하는 인생수업 일 수 있다는 말이다.

헤어짐을 두려워하고 있는 어린 친구에게 나는 용기를 주고 싶었다.


수많은 날들을 여행을 위해 함께 머리를 모으고 계획을 세웠을 친구, 낯선 나라를 여행 중에 서로 의견이 달랐고 충돌로 이어졌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여행지에 친구를 혼자 두고 귀국해 버리는 사람은 이미 관계를 상실하였다.

그런 친구는 지금이 아니라도 어쩌면 나처럼 나이가 들 때까지 친구라는 이름으로 네곁을 서성이며 너를 신경 쓰이게 할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은 친구를 잃은 것이야"


나는 경험이 없었다면 내리지 못했을 극한 조언을 어린 친구에게 해 주었다.


막내 여행객의 얼굴이 처음으로 활짝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