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에 이어 어버이 날. 그리고 스승의 날이 있는 오월. 오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펜데믹으로 조심스러운 가운데서도 가정의 날 행사는 꼭 지켜졌다.
축제가 아닌 행사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운 것은 이 날은 즐기기보다 어떤 의무감이 존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날에는 내가 준비한 선물을 주고 그 후 3일 후에는 아이들이 카네이션을 보내왔다. 카네이션이 시들 때 쯤 스승의 날이 다가왔다.
매년마다 이 날이 돌아오면 우리들에게 문학을 지도하고 문단으로 이끌어 주신 교수님을 찾아뵌다. 함께 식사를 하고 마련한 선물을 드리고 스승의 노래를 불러드린다.
환갑을 훨씬 넘은 제자들이 아흔살이 가까운 스승님을 뵙는 일은 흐뭇한 일이다.
한 때는 스승의 날이 다가오는 걸 싫어한 적도 있었다.
내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촌지가 난무했었다. 선생님의 따뜻한 눈길 한 번이 아이의 정서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알기에 부모들은 편법인 줄 알면서도 존경심이라곤 전혀 없는 촌지를 의무적으로 상납하였다. 남편의 적은 월급에서 어린이날 아이들의 선물과 어버이날 양쪽 부모님의 용돈, 그리고 곧이어 스승의 날에 두 아이 선생님들께 촌지를 드리고 나면 오월의 내 형편은 언제나 궁했다.
요즘처럼 맑고 청렴한 사회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촌지를 주고받는 일이 보편적이었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누구누구 선생님이 촌지를 밝힌다더라 라는 암묵적인 비밀이 나돌기도 했다.
누가 달랬나? 주고 나서 험담이나 하며 사도에 대한 예는 찾아볼 수도 없었던 부끄러운 학부모였다.
한 때, 기념일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평소에 자주 뵐 수 없는 스승님을 1년에 한 번쯤 기념일을 핑계 삼아 찾아뵙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무리 세상이 혼탁해도 참 스승은 어디에나 꼭 계신다
오늘은 스승의 날, 생각나는 선생님이 계신다. 나의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첫 에세이집을 출간했을 때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고향 친정집 바로 윗동네에 살고 계셨다.
학교를 퇴임하신 후 향토 사학자로 일하시며 우리 고장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고 있는 중이라고 하셨다.
당신이 쓰신 원고를 나에게 보여주셨다. 마침 안경을 쓰고 가지 않아서 선생님 책상 위에 있는 돋보기를 빌려서 썼다.
그 모습을 바라보시던 선생님께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 그새 그렇게 눈이 어두워서 어쩐다냐?''
나이 들어가는 제자가 안되어 보였나 보다. 훗날 다시 찾아가 보았을 때 집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집을 떠나 요양원으로 가셨다고 한다. 가슴에 돌덩이 하나가 얹혀있는 듯했다.
내가 평생 글을 쓰는 삶을 살게 된 것도 어쩌면 선생님 덕분이다
내가 쓴 알량한 글들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 선생님의 제자사랑이 문학소녀의 꿈을 실현시켜 주신 것이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나를 찾아오는 청년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는 우리말이 서툴렀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외국에서 살다가 온 아이는
그렇다고 영어에 능숙하지도 않았다. 선천적으로 언어발달이 미숙한 학생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꾸준히 나와 함께 했다.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훌륭하게 성장한 젊은이가 수줍게 꽃다발을 내 민다. 그 모습이 고맙고 대견하기만 하다.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준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따뜻하고 감사한 마음이라면 더욱 고맙다. 누군가에게 좋은 의미로 기억되는 하루, 모두의 마음에 한 사람의 스승만 있다면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견뎌 낼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오늘은 일 년에 단 한 번 교복을 입은 소녀가 되어보는 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