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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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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Jun 11. 2021

내 이름을 불러 줘

결혼생활 41년, 믿기지 않겠지만 남편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 아직도 없다.

지금껏 어떻게 살았냐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와 남편은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그 당시  공무원으로 지방 도청 소재지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남편은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누나가 있는 도시로  유학을 온  명의 동생과 자취를 하면서 항상 시간에 쫓기며 살았기에 제대로 데이트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퇴근 후면 부지런히 집에 와서 동생들 저녁식사를 챙겨 주고 나서야 겨우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쯤 창가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휘리릭 휘리리리...

휘파람새가 된 남편이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다. 휘파람 소리는 멀리서도 잘 들린다. 애인을 부르는 소리가 골목을 헤매다가 내 창가에서 멈춘다.


터키의 북부 폰투스  산맥 깊숙이 살고 있는 쿠스 코이 (KusKoy)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휘파람으로 대화를 하는 걸  보았다. 휘파람 언어는 2017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남편은 그보다 수십 년 전부터 이렇게 휘파람으로 자신의 의사를 소통하며 살았다.


휘파람은 멀리서 혹은 소란스러운 곳에서도 또렷이 들린다. 등산길이나 또는 사람이 많은 공원에서 뒤처진 나를 찾을 때면 특유의 리듬을 실어 부르는 휘파람 소리가 때론 유익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남편의 애완견처럼 어디서나 휘파람 소리만 들리면 반갑게 뛰쳐나갔다.


결혼해서도 휘파람 소리는 계속되었다. 퇴근 시간이 되면 저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고도 한참 후에야 도착하는 아빠를 맞이하려고 냅다 골목을 달린다.

서른 살을 지나 마흔 살을 넘어 오십이  때까지도 나는 그저 나를 부르는 호칭이 없어도 사는데 지장 없이 휘파람 하나로 모든 게 무사히 소통되었다.

환갑을 훌쩍 넘고 뒤늦게 찾아온 갱년기에 들어서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 젖히는 엄마라는 이름 외에 내 이름은 없다. 남편이 부르는 호칭도 아예 없다. 언제부터인가 그나마 들리던  휘파람 소리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 날인가 정색을 하고 더 이상 휘파람으로 나를 부르지 말 것을 요구한 뒤로 휘파람 소리는 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랬을 뿐, 차선책이 없다


친구 남편들은 부분 아내의 이름을 부르거나 아니면 아이 이름 뒤에 엄마라는 호칭을 붙여 아무개 엄마라고 부르기가 예사이던데 남편은 그도 쑥스러워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자기야 ''를 부르며 사는 나와 달리 흔한 어이~라는 표현조차 하지 않는다.

눈빛만 봐도 아는 부부 사이에 굳이 호칭이 필요 없을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넓은 집에 단 둘이 살면서 서로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진다.

요즘 들어 호칭 없이 부르는 일에 유난히 마음이 쓰인다. 

''이리 좀 올라와 봐''라고  이층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여기다가 둔 내 마스크 어딨어''라든가 숫제 호칭은 생략하고 본론만 말하는 화법으로 굳혀진 남편에게 이제라도 나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었다.


부부란 나이 들면 친구와도 같다.

함께  여행을 가고 함께 자전거를 타고  봄이 되면 함께 쑥을 캐러다니는 사이좋은 친구지만 젊었을 때의 두근거리던 설렘은 잠시, 삶의 역경을 함께 헤쳐나가는 동지가 되어 살다가 한숨 돌려보니 그도 나도 머리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살아온 세월이 금방인데 살아갈 날은 또 얼마나 남았을까? 사는 동안 정스러운 표현이나마 많이 듣고 들려주고 싶었다.


오늘은 오래전에 이서 첫 아이 이름을 지을 때처럼 머리를 맞대고 이름을 짓고 있다. 결혼하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남편이 불러주는 내 이름을 짓는 날이다.

어느 부부나 평범하게 부르는 ''여보'' 말을 우리 남편에게는 듣기  어려울 것 같다. 친구들 남편처럼 딸아이 이름 뒤에 엄마를 붙여 불러달랬더니 그도 쑥스럽단다.

얼마 전에 하늘나라로 떠난 강아지 이름, 또찌 엄마가 원래는 내 호칭이었다. 워낙 강아지를 예뻐하니까 주변에서는 나를 또찌 엄마라고 불렀다. 하지만 강아지는 엄마 이름을 가지고 떠났다.


''내 이름을  불러줘''


어쩌면 나는 뒤늦게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듯이

남편이 내 이름을 불러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대단한 부탁이라고 남편은 난색을 표한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남편이 드디어 호칭을 생각해 냈다.

루시아..., 어때, 남편이 말한다

그래, 내 세례명이 있었구나,

성당 식구들이나 불러 주던 내 세례명을 남편이 불러 준다면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세례명 또한 나의 또 다른 이름이니까....


''루시아  어디 있어''

''루시아  빨리 와''

''루시아  나 다녀올게'


입에 착착 붙는 호칭이다.

용건 앞에 이름 하나 붙여주었을 뿐인데 어쩌면 그렇게도 다정하게 들릴까?

고마워..., 뒤늦게 불러주는 내 이름, 하루에 열 번씩 불러주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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