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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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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Jul 10. 2021

너를 위해 만든 책

요즘 독서에 열중하는 아이에게 은근히 물어보았다.

" 너 임금님의 배냇짓 읽어 봤어?"

"아뇨"

초등학교 4학년인 손녀가 아직 읽지 않았다고 하는 그 책은 10년 전 손녀만을 위해서 내가 만든 동화책이다.

나는 안다. 손녀 아이가 언젠가는 그 책을 읽게 되리라는 걸, 서둘지 않아도 그날이 올 테지만 책을 읽은 후  아이가 지을 표정이 궁금해지는 어떤 기대감 때문이다.


손녀가 첫 돌을 맞이 했을 때 나는 손녀에게 기념이 될 만한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실은 기념은 기억의 하위 개념이었다. 아이가 커서도 나를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게 더 큰 목적이었으므로...,


글 쓰는 할머니가 만든 건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동화책이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일곱 명의 백성(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삼촌, 또찌, 세찌)이 사는 작은 나라에서 아기 임금님에게  서로 잘 보이려고 티격태격 우왕좌왕 시끌벅적 살면서도 자신들의 임무를 잘 지키며 평화롭게 지낸다는 내용의 글이다.


이 책은 총 세 권 밖에 없는 나름 귀한 책이다.  아들에게 부탁하여  POD로 인쇄를 해서 만든 책 중  아이에게 줄 한 권은 표지를 내가 직접 만들었다. 겉 포장을 천으로 덮고 수를 놓아서 바늘로 꼼꼼하게 꿰매어서 절대로 훼손되지 않도록 튼튼하게 엮었다


세 권의 책은 각각 주인을 찾아갔다. 한 권은 책 속의 주인공인 손녀 집에 한 권은 친할머니 댁에 또 한 권은 외갓집인 우리 집에 간직되어 있다. 아마 어느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것보다도 안전하고 귀하게 보관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 동화책을 지은 지 올해로 10년이 되었다. 책은 책꽂이가 아닌 조금 특별한 장소( 농 속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두었었다. 그래서인지 바로 어제 만든 것처럼 깨끗하였다.


말끔한 책을 보면서 아이가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책이 있는 세 곳 모두 무슨 '비밀의 '나 되는 것처럼 너무나 꽁꽁 숨겨 두었기 때문이다.

 

손녀를 위한 동화책

   


드디어 손녀가 10년 전에  만든 동화책을 읽고 있다

학교를 마치고 바로 외갓집으로 오는 날이 일주일에 한 번 있다. 학원을 가지 않는 오늘 하루는 공부에서 해방된 시간이기도 하다. 아직 자신의 핸드폰을 갖지 못한 아이에게 외갓집은 천국이다, 좋아하는 너튜브를 원 없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책을 놓아둔 내 작전이 들어맞았다.

예전 같으면 컴퓨터부터 켜고 거기에 몰두할 텐데  속으로 들어갈 기세다.

주인공의 이름이 자기 이름인 것도 신기하지만 어설픈 백성들이 모두 우리 가족들인 것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


처음 동화를 지을 때부터 나는 오늘 같은 날이 오기를 무척이나 기다렸다.

아이가 자라서 글을 깨우치고 더구나 할머니가 직접 만든 책을 읽는 소녀로 자란다는 상상은 정말 동화처럼 아름답고 신기한 세상의 일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바로 오늘, 지금, 저 이층 서재에서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작가와 독자가 만났다. 어느 평론가의 비평보다도 단 한 명뿐인 독자의 첫마디가 몹시 궁금했다.

 

''할머니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배냇짓이 뭐예요?''


아뿔싸..., 책의 제목부터 컴플레인이 걸렸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짓는 얼굴 표정이란다.''


순간 제목을 잘못 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제목인 '임금님의 배냇짓'은  모두 일곱 편의 짧은 글로 엮은 동화다. 그중에  비밀스러운 하늘나라의 언어를 알고 있는 아기 임금님이 웃고 찡그리고 우는 표정의 배냇짓으로 꿈속에서 다른 나라 임금님들과 대화하는 이야기를 쓴 글의 제목을 책 제목으로 정했었다.

좀 더 재미있고 쉬운 제목으로 썼더라면 좋았을 걸...,

'누가 내 머리에 똥을 쌌을까?'라든지 ' 내 대신 학교에 가 줄래? ' 등, 제목만 보고도 읽고 싶게 만드는 동화책이 얼마나 많던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한 나의 실책이 드러났.


''할머니, 이 그림은 옛날 어린이의 돌날 사진 같아 보여요'' 


아이의 돌  경을 삽화로 그려 넣은 그림에 시대적 착오가 생겼다. 그림까지 꼼꼼하게 체크할 줄 몰랐다. 

아이의 직설적인 표현 나도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 말대로 그림이 예스럽기는 하지만 이건 좀 심한 평가다.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그림 그리기에 취미 이상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 독자님께서 직접 그려보던가요 ''


속 좁게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민 A4용지에 아이는 쓱쓱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할머니 그림(좌)과 손녀 그림(우)



뭐가 다르지?

손녀가 그린 그림은 역시 순수하고 해맑았다. 아이 중심의 내 그림과 달리  아이가 그린 그림 속에는  가족이 있었다. 그림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제 집으로 간 아이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글을 쓰고 그림 좀 그린다는 이유만으로 동심도 없이 선뜻 동화를 쓴 나를 뒤돌아보게 했다. 


독자는 혹독한 비평만 하는 게 아니었다.

''멍청이 삼촌은 정말 멍청해 크크크''

'멍충한'이라는 별명을 가진 왼손잡이 삼촌이 세상 모든 걸 왼쪽으로 만들어 놓아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재미있었던가 보다.

아이의 표정 하나에 내 마음이 널뛰기를 한다.


문득 이 책을 다시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삽화를 그리고 내가 다시 글을 다듬어서 쓴다면 이제는 동심 가득한 동화책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에는 장롱 깊숙이가 아니라 동네 서점에서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동화책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모두에게 읽히는 그런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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