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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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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Oct 03. 2021

길들여진 시간

''만약 네가 오후 네시에 온다면 나는 세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여우가 들려주는 이 말이 '어린 왕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누군가를 위해 식탁에 꽃을 꽂고 집을 치우고 그와의 만남을 상상하는 일은 즐거움을 넘어서 행복한 일이다.


어떤 만남이든 만남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 아주 먼 곳에서 귀하신 손님이 오셨다. 글을 통해 알게 된  브런치 작가님을 처음 만나는 날이다.

먼저 용기를 낸 건 그쪽이었다. 댓글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고 나는 대뜸 그를 초대하는 문자를 보냈다. 안 봐도 본 듯, 글을 통해서 서로 알고 있기에 믿음이 가는 만남이다.


전에 내가 사는 동네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는 작가님은 지금은 멀리 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잠시 귀국하였지만 코로나로 인해 발이 여 뜻밖의 긴 시간을 갖게 되었다.

멀리 있는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정작 본인은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오늘 우리의 만남도 그런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설렘은 참으로 신선하다. 내가 상상하고 있는 모습과 얼마나 맞아떨어질까? 글 속에서 느낀 품위와 위트를 생각하며 내 상상력이 맞아주기를 바라며 그를 기다렸다.


서울역 앞에서 택시를 탔다는 문자를 보낸 한참 후, 기사님이 우리 집 주소가 아닌 엉뚱한 곳에 내려 주었다는 전화가 왔다. 의미 있는 첫 만남인데 순조로우면 재미가 없지, 야릇한 들뜸이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동네 골목길에서 처음 만났다. 나도 그를 첫눈에 알아봤고 그도 나를 보고 멀리서 손을 번쩍 들었다.


'글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맞다. 내가 글을 통해 상상한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만났지만 오래 본 사이처럼 금방 이야기가 통했다.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아도 실명과 나이를 알아맞히는 것까지 똑같았다. "비문이 있으시다면서 좀 어떠세요" 내가 쓴 글을 읽고 건강을 걱정해 준다. 둘 다 상대의 글을 열심히 읽고 있는 독자라는 게 증명이 된 셈이다.  

남편은 손님이 마실 커피를 갈아서 준비해 놓고 우리 둘만의 시간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글에서 읽었던 내용들을 확인하는 시간은 잠시, 작가와 독자가 아닌 어제 만난 친구처럼 사는 이야기들로 시월의 첫날, 아름다운 시간들을 채워나갔다.


인생은 거미줄처럼 엮인 수많은 인연들로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의 만남으로 삶의 길이 정해지고 많은 이야기들이 탄생하며 그 인연은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 것도 인연이지만 이렇게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도 어쩌면 특별한 인연이다. 어찌 보면 브런치에 몸담고 글을 쓰고 있는 우리는 서로 만나지는 않더라도 인연의 끈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면서 몇 분은  직접 만나보고 싶은 작가들이 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내 집에 초대해서 오늘처럼 꼭 글이 아니더라도 사는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 산다는 게 별건가 한 잔의 차를 마시면서 자신과 닮은 사람들과 시간을 공유하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내며 산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둘 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고 산책을 나간 남편이 돌아왔다. 그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사는 곳이 다르고 살아온 세대가 달라도 글은 묘하게 두 사람을 어우르게 해 주었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인데 아쉬웠다. 어느덧 우리는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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