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에 시장 구경 가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나는 남대문 시장에서 발품 파는 쇼핑을 좋아하고 우리 동네 재래시장에서 물건 사는 것을 좋아한다.
할머니들이 앉아서 다듬어놓은 정갈한 채소들은 내 일감을 덜어 주어서 좋고 기름에 튀겨 파는 꽈배기와 매콤한 떡볶이, 그 국물에 찍어 먹는 순대도 시장이라야 제 맛이 있다. 커다란 돼지 머리가 혐오 감 없이 웃고 있는 것도 재래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여행을 가서도 그곳 시장을 찾아갈 때가 가장 즐겁다.
닐 쉬르 라 소르그의 벼룩시장은 유럽의 3대 벼룩시장 중에 하나다. 위치로 보아 숙소가 있는 살롱 드 프로방스보다 앞으로 우리가 여행할 아비뇽에서 더 가깝지만. 오늘 그곳을 가야 하는 이유는 매주 일요일에만 시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유럽의 일요일엔 움직이지 말라'라는 글을 어느 여행 전문지에서 읽은 것 같다. 일요일인 오늘, 집들의 덧창 문(볼레)은 모두 닫혀 있고
시내의 상점도 문을 열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부산을 떨며 외출을 준비하는 사람은 우리 부부밖에 없는 것 같다.
기차역은 오늘도 썰렁하다. 역사 옆에 달랑 자동 티켓 발매기만 놓여 있을 뿐, 휴일이라고 해서 역무원이 없는 기차역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안 되는 일이다.
기차 시간이 임박해지자 다행히 닐 쉬르라 소르그로 장을 보러 가는 일가족이 나타났다. 젊은 엄마와 사내아이, 그리고 사내아이의 할머니인 중년의 여인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닐 쉬르라 소르그 장터까지 수월하게 갈 수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은 우리뿐인 줄 알았는데 기차역에서부터 시내 입구까지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그야말로 사람들이 시냇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한 구역이 아닌 마을 전체가 시장이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 중에 반은 상인이고 반은 손님이었다. 물건의 종류도 다양하다.
누군가 사용한 흔적이 있는 나무로 만든 개집에서부터 중세의 열쇠. 그릇. 그림. 실 바늘 단추. 등 심지어 변기까지..., 벼룩시장에 나와 있는 물건을 구경하는 것만 해도 웬만한 민속박물관을 관람한 것보다 더 풍요로웠다..
길가 가판대에 진열된 물건들은 대부분 지키는 사람이 없어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지만 정작 물건을 구입하려고 하면 어디선가 주인이 나타나 흥정을 한다. 누군가가 오랜 시간 공들여 수를 놓은 탁자보가 눈에 띄었다. 오래 사용한 흔적은 있지만 낡거나 뜯어지지는 않았다. 한 귀퉁이에 수를 놓은 사람의 이니셜까지 바느질이 되어 있어서 더욱 맘이 끌렸다. 내가 그것에 관심을 보이자 어디선가 주인이 나타났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였다. 살 거냐고 묻는다. 값이 얼마냐고 되물었다. 벼룩시장에 어울리지 않게 계산기를 두드려 보여 준다. 15유로, 공들여 수를 놓은 값에 비하면 무척 싼 금액이다. 나는 싹둑 잘라 10유로를 불렀다. 선뜻 “오케이”라고 하며 노란 종이봉투에 볼품없이 담아 준다. 더 깎아도 되는 걸 그랬나?
잠깐 깍쟁이 같은 생각이 들었다.
황소의 뿔을 잡아당기면 불이 켜지는 청동 라이터를 샀다. 나중에 보니 아주 작은 글씨로 한 귀퉁이에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쓰여 있다. 오래된 옛 물건인 줄 알았는데 실망했다. 하지만 장터에서는 이런 작은 속임수조차 용서가 된다.
나막신도 한 켤레 샀다. 다육이를 심어서 우리 집 신발장 위에 올려둬야겠다. 물고기 모양의 단추는 내 겨울 코드에 달면 어울릴 것 같다. 그밖에 청동으로 만든 새 두 마리와 나비 모양의 펜던트를 샀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싸고 예쁜 물건을 사는 맛이 쏠쏠하였다.
닐 쉬르라 소르그는 벼룩시장 만이 눈길을 끈 건 아니다. 마을 전체를 휘돌아 흐르는 물길이 장관이다. 집과 집 사이를 흐르는 수로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청둥오리들도 장날만큼은 부산하게 움직인다. 사람들은 이곳을 ‘작은 비엔나’라고 부른다고 한다.
냇물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우리도 수로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노점에서 산 햄버거로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에 아까 봐 둔 남편의 모자를 사러 갔더니 그새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 오후 6시까지는 시장을 연다고 했지만 이곳 상인들은 일요일엔 돈을 버는 일조차 쉬고 싶나 보다.
길가에 좌판 상인은 오후가 되자 자신들의 물건을 차에 싣고 모두 떠났다. 거리는 어느새 텅 비어 있고 이제야 사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시냇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닐 쉬르라 소르그 마을에는 고급 엔틱 가구점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오후에는 엔틱가구들을 구경하는데 시간을 소비했다. 이곳에는 주로 덩치가 큰 가구나 비싼 장식품들이 많았다.
오전의 시끌벅적한 벼룩시장과는 딴판으로 오후의 엔틱 샾에는 주인이나 손님 모두 여유가 있다.
오성급 호텔이나 부잣집 정원에 어울리는 가구와 조형물, 샹들리에등을 눈이 물리게 구경하였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는데도 꽤 시간이 걸리는 큰 금액의 장식품을 보면서 역시 나는 벼룩시장이 취향에 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 종일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힘이 들지 않는 건 아마 주변의 시냇물에서 번져오는 적당한 습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하나씩 사 모은 물건들로 배가 부른 내 쇼핑백 때문인지도 모른다.
벼룩시장은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물건을 사는 재미도 쏠쏠하다. 프로방스의 시골마을 장터에서 지름신이 내렸다. 그래 봤자 우리 돈 만원 남짓 한 것들 뿐,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물건이지만 훗날 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가끔씩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