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단기를 연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옛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기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워 즉위한 기원전 2333년을 원년으로 하는 연호이다. 그 후 박정희 시대에 단기 연호를 폐지하고 서양력에서 사용하는 서기로 연호를 바꾸었다. 그때가 1962년이었다.
나라에서 지금껏 사용하고 있던 연호를 바꾼다는 것은 대단한 혼란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그 후, 1968년에 개인별로 고유한 등록번호를 부여받는 주민등록이 만들어졌다.
주민등록 앞자리는 자신이 태어난 생년월일의 숫자가 기록되었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일사불란하게 사무를 처리할 때가 아니라서 이 과정에서 많은 혼동과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나도 어쩌면 이런 혼란 속에서 피해를 본 한 사람일 수 있다.
음력은 양력보다 한 달여가 늦다. 나처럼음력으로 생일이 12월인 사람은 해가 바뀌어 다음 해 1월이정확한 양력의 날짜다.그런데 내 주민등록 앞자리는 음력 생일이 그대로 적혀서 내가 태어난 날과는 무관한 날이 평생 내가 태어난 날이되어버렸다. 그래서 해마다 음력도 양력도 아닌 오늘처럼 엄한 날에 주변 사람들에게서 생일 축하를 받곤 한다.
친구들중에는 자녀들이 기억하기 쉽도록 생일을 양력으로 바꾸었다는 이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내 자녀가 기억하기보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기억하는 생일이 더 소중하였다.그래서 지금껏 시대에 맞지 않게 생일만은 음력으로 보내고 있다.
아무튼 생일을 맞으려면 아직도 한달이나 남은 오늘은정확히 내 생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 아침여기저기에서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대부분 어떤 연유로든컴퓨터에내 신상이 기록되어 있는 기업이나 내가 다니는 병원, 혹은 동네의 크고 작은 사업장 등에서고객관리 차원으로 보내는 이례적인 축하인사인지라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페이스북은 친절하게도나와 팔로우를 맺은 친구들에게주민등록번호에 적힌 날짜그대로를생일이라며 모두에게 알려주었다.
친한 친구에서부터 막역한 사이까지 보내주는 축하카드를 받으며 부정도 긍정도 할 수없어 그냥 고맙다는 댓글로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아주 따뜻한 선물을 받았다.
우리 집아래층에는 평일에는 재택근무를 하고 휴일이면 자신이운전하는차를타고 캠핑을 떠나는,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취미를 가진 멋진처자가 살고 있다. 그가 생일 선물을 보냈다.작년 가을에이사하여 처음 집들이를 하던 날, 친구 한 명이 화장실에 갇혀서 119까지 출동하는 소동이있었다. 이런해프닝으로 인해 서로의 담이 허물어지고 우리는 주인집과 세입자가 아닌 엄마와 딸처럼 오붓한 사이가 되었다. 실제로 내 딸과는 동갑의 나이인 그는 언제 봐도곰살맞았다
어쩌다가 자신이 고등학교에 다닐무렵에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내 딸처럼 품어주고도 싶었다.
맛이 있든 없든 내가 만든 음식을 보내주면 고맙게 받고 뭔가를 빈그릇에 채워 준다. 싹싹하고 상냥해서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만한 딸이다.
선물로 보내온 택배 상자 안에서 좋은 향기를 품은 화장품 세트가 나타났다. 어떻게 할까? 지금 바로 내려가서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니라고 말을 할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그래, 꼭 태어난 날만이 생일은 아니지 너하고 내가 엄마와 딸로 통한 날도 생일보다 더 소중한 날이지, 오늘은 우리들의 날로 하자.
''귀한 선물 고맙게 잘 받을게''
문자를 보낸 후 이사 올 때 받아 둔 부동산 계약서에서 주민등록번호의 앞자리를 찾아보았다.다행히 한 달 후가 그의 생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은 음력으로 보내는 내 생일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