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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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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Dec 16. 2021

이젠 더 이상 묵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일을 그르쳤을 때 ''죽 쑤었다'' 또는 ''묵 쑤었다''라고 한다.

우리 이제 그러지 맙시다. 올 가을에 생전 처음 도토리 묵을 쒀 본 나는 묵에 대해 저가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과감히 성토를 할 것다.


뒤늦게 파크골프에 재미를 붙인 우리 부부는 친구 부부와 함께 여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운동을 했다.

어느 골프장 초입에서 멤버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도토리 한알이 머리 위에서 '툭'하고 떨어졌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도토리가 나 잡아 보라며 '또르르' 굴러간다. 자세히 보니 떨어진 도토리가 한 알뿐이 아니었다. 풀밭 여기저기에 반짝반짝 숨어 있는 녀석들, 줍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첫 알을 시작으로 남편과 친구 부부까지 합세하여 오며 가며 주운 도토리가 제법 모아졌다.


이런 걸 사서 고생이라고 한다.  도토리가 한 줌 한 줌 모아질 때만 해도 몰랐다. 젊어서도 해보지 않은 생고생의 전초전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채반 가득 도토리들


주워 온 도토리를 채반에 담아서 햇빛 가득한 옥상에서 말렸다. 바사삭 말라가면서 저 혼자 훌러덩 옷을 벗어젖힐 줄 알았는데 도토리는 생각보다 요조숙녀였다. 가을 햇살에 껍질이 터서 갈라진 사이로 속살이 보일 듯한데도 절대 맨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경험자에게 여쭤봤더니 껍질을 벗기려면 도토리를 자루에 넣어 시멘트 바닥에서 발로 마구 밟아야 된다고 한다.

버리자니 아깝고 만들자니 힘들고 이걸 어쩌나...,  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저녁이면 TV 앞에서 도토리 껍질을 까는 게 일과가 되었다. 남편이 못을 빼는 기구인 뺀치를 가져왔다.

발로 짓이겨 밟아도 깨지지 않던 도토리가 도구를 사용하자 조금만 힘을 줘도 으스러진다.

손가락 마디가 뻐근하다. 


하지만 결국 해냈다. 뽀얀 속살을 드러낸 도토리를 보면서 나에게도 끈기와 인내란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이제 방앗간에서 가루만 만들어 오 드디어 말랑말랑 촉촉한 묵이 완성되겠지, 세상일이 생각대로만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 있게 가지고 간 도토리를 보자마자 방앗간 주인아주머니는 두말없이 보이콧을 했다. 이유인즉슨 도토리를 물에 불려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돌처럼 단단해진 도토리를 그냥 기계에 넣고 갈다가는 자칫 기계가 고장이 날 수도 있다고 한다.


''아이고 이렇게 단단한 걸 가져오면 우리 기계 이빨 다 나가 ''


참 정스런 표현이기는 하지만 기계가 늙어서 이빨이 부실하지 않고서야 어찌 쇳덩이가 그깟 도토리쯤 못 갈겠느냐며 속으로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묵 첨 만들어 보지? ''라고 되묻는다.


숙제를 잘못해 온 아이처럼 멀뚱하게 서 있는 나에게 아주머니의 설명이 이어진다.

도토리를 껍질 째 갈아주는 방앗간도 있긴 하지만 이곳은 그런 기계가 없기 때문에 알갱이를 부드럽게 만들어서 가져와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토리는 찬물에 우려내지 않으면 떫은맛이 강해서 먹지 못할뿐더러 상온에서는 물에 쉽게 가라앉지도 않으니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그때 불려서 가져오라고 차근하게 알려 주었다.


퇴짜 맞은 도토리를 들고 집으로 오면서 이 나이에도 아직 모르고 있는 게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도토리묵 앞에서 겸손해져야 할 것 같았다.


도토리 앙금 만들기


묵 만들기 최고 고난의 코스는 분말을 주머니에 넣고 물에 치대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토리의 껍질을 벗겨냈으니 분말을 내면 그냥 묵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가 먹는 건 앙금이었다. 주머니넣고 힘껏 주물러서 걸러내기를 수 차례, 내가 이러려고 도토리를 주워왔나. 후회가 밀려왔다. 걸러낸 도토리 녹말은 물에 녹아 앙금이 되고 가라앉은 앙금만 모아서 말려야만 비로소 밀가루처럼 뽀얀 도토리 묵 가루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 동안의 고생이 날아가는 순간


묵 만드는 과정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묵사발이 되었다''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상대에게 완전히 패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이 말과 묵사발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묵을 끓여서 들기름을 바른 사발에 담아 굳힌 뒤 그 사발을 뒤집었을 때  탱글탱글한 묵이 봉긋하니 떨어져 나올 때의 느낌이라니..., 살짝만 건드려도 파르르 하게 떠는 수줍음을 보았더라면 묵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첫작품 묵사발과 묵무침


쫀득하고 야들야들한 묵이 완성되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스르르 사라지는 순간이다.

함께 운동을 하 친구 부부를 초대하여 묵파티를 벌였다. 잘 익은 김장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구수한 김가루를 올려 육수를 부어 만든 묵밥과 달큰 짭짤한 양념을 끼얹어 만든 묵 무침이 상에 올랐다. 맛있다고, 도토리 묵밥 집을 차려도 되겠다고 엄지를 치켜들면서 치하해 주며 내년에도 또 만들 거냐고 묻는다.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묵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얼대...


다시는 맛볼 수 없는 귀한 도토리묵이 목을 타고 저절로 넘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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