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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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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Mar 27. 2022

뿌듯하다 된장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된장이 끓고 있다.  애호박과 두부를 넣고 한소끔 끓인 뒤 청양고추로 마무리, 밥상에 된장찌개 하나만 있어도 밥 한 그릇 뚝딱이다.


국인들에게  된장찌개는  손쉽게 끓여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기는 하지만 그 집의 음식 맛은 장 맛이라고 된장을 만든 주부의 손맛에 따라 집집마다 맛이 다른 게 또한 된장찌개의 맛이기도 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김장을 마치고 나면  곧이어 콩을 쑤어서 메주를 만드는 일이 우리 어머니들의 일 년 사였다. 뜨끈한 온돌방의 시렁 위에서는 겨우내 쿰쿰하게 발효된 메주 냄새가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지만 어렸을 적부터 고 자란 그 냄새는 이미 후각도 묵인한 냄새다.


결혼한 후에도 된장 간장 그리고 고추장은 으레 친정엄마가 보내 주셨고 나는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해마다 보내오던 친정집 장맛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했다.


김치도 고추장도 된장도 슈퍼에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되지만 유난히 된장만은 어머니 손맛을 재현해 내지 못하였다. 그동안 지인들이 직접 담근 된장을 간간히 보내주기도 하고 소문난 장 맛집에서 담근 된장을 사 먹기도 했지만 언제나 뭔가 조금씩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최근에 생전 처음 장 담그기에 도전을 했다.

누가 보면 대단하게 힘든 일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가 한 일이라곤 문 앞에 배달된 메주를 함께 보낸 정량의 물과 소금을 통 안에 들이붓고 기다리는 일 밖에 없었다.


어느 날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홈쇼핑 프로를 보게 되었. 마침 강원도의 어느 농협에서 농부들이 직접 만든 메주를 판매하는 중이었다. 우리 콩으로 예쁘게 만들어서 잘 띄운 메주와 메주를 담글 때 필요한 부재료들을 함께 보내주는 화면을 보고 선뜻 신청하였다.

며칠 후, 주문한 택배가 도착했다. 독을 대신한 플라스틱 통과 잘 띄운 메주, 그리고 숯과 대추, 마른 고추 등 심지어 메주를 담글 물과 정량의 소금까지 들어있었다.

보내 준 재료를 한꺼번에 통에 들이붓고 60일을 기다리면 간장이 우러나게 되고 간장을 떠낸 뒤 메주를 분리해서 으깨면 된장이 된다는 설명서까지

함께 있다. 


쉽다. 이렇게 쉬운 일을 우리 어머니들은 왜 그렇게 어렵게 하셨을까?

장 담그는 날은 특별히 손 없는 날을 가려 담아야 했고 장독대에 부정을 타지 않게 하려고 간장을 담은 항아리는 새끼줄에 고추와 숯을 메단 삼신 줄을 칭칭 동여 매 놓기도 했다. 장을 담아놓은 장독대는 무언가 신성하게 여겨졌다.

비라도 올 듯하면 장독 뚜껑부터 닫는 일이 시급했다. 장이 익을 때까지 어머니의 정성은 온통 장독대에 머물렀다.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둔 뒤 두 달 동안 베란다 한편에 두고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이제야 생각이 났다. 다행히 정해준 날짜를 넘기지는 않았다. 무심하게 열어 본 플라스틱 통 안에서 마법이 일어나고 있었다. 도대체 60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도무지 메주에서 우러난 물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혹적인, 연한 커피 빛깔의 간장눈앞에서 찰랑거린다.


와인이 신의 눈물이라고? 그렇다면 간장은 신의 한숨이다. 짜디짠 소금물 속에서 두 달 동안 혀 낸  간장은 그야말로 메주의 애간장을 다 녹인 국물이다. 뜨거운 가마솥 안에서 끓이고 삶고 짖이겨저 가슴에 곰팡이가 피도록 견뎌낸 인고의 시간,  메주 고난과 정성이 녹아있는 간장은 어쩌면 오랜시간 참고 살아 온 우리 어머니들의 진한 삶의 엑기스일지도 모른다.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찍어 내가 만든 간장의  첫맛을 본다. 됐다, 이제 나머지는 햇살의 몫이다.


간장을 른 뒤 된장을 만드는 일에 생각지도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그냥 메주를 주물러 통에 담아두면 저절로 된장이 만들어지는 줄 알았는데 소금으로 적당히 간을 맞춰야 하고 되지도 질지도 않게 적당한 용도로 으깨주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이 '적당히'라는 말이다. 순전히 내 주관대로 결정해야 하는 질량의 느낌, 얼마 큼이 적당한지 지금껏 남이 만든 된장만 받아먹은 내가 알리가 없다.


이럴 땐 경험자의 조언이 가장 확실하다. 고향에 사는 올케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올케언니는 어머니의 장 담그는 비법을 그대로 전수받은 유일한 가족이다. 비법은 다름 아니라 된장을 가를 때 콩을 삶아서 함께 버무리는 것이라고 한다. 전혀 모르고 있던 새로운 방법이 하나 추가된 셈이다.


다시 오랫동안 한정식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메주를 으깰 때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서 질거나 된 것을 조절하라고 한다. 이 친구는 보리를 무르게 삶아서 넣으라고 다. 역시 '적당히'라는 명제가 붙었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의 만물박사는 된장을 항아리에 담을 때 소금 대신 마른 다시마를 덮어 놓으면 곰팡이가 슬지 않는다는 꿀팁을 주기도 했다.


집마다 장맛이 다른 이유를 알았다. 모두 자기만의 비법 하나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알려 준 비법중에 하나씩을 골라 선택했다. 올케언니가 가르쳐 준대로 콩을 무르게 삶은 뒤 거기에 친구가 알려준 우려낸 간장을 넣고 된장을 버물였다. 마지막에는 지식인에서 알려준 대로 항아리에 된장을 눌러 담은 뒤 소금 대신 다시마 줄기로 된장을 덮었다.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맛을 품은 나만의 된장이 탄생되는 순간이다.


봄청소를 마친 장독대에 된장 항아리를 앉혀두고 나니 종가집 며느리나 된 듯 뿌듯하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매일 아침 항아리 뚜껑을  닦던 어머니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어서 익어라

잘 익은 황금빛 된장은 제일 먼저 딸네 집에 가져다주고 싶다. 손으로 담근 된장을 딸에게 주면서 친정어머니의 정성을 되새겨보고싶다.


예쁜 옹기에 담아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 손에도 들려주고 싶다. 별것은 아니지만 내가 직접 담근 것이니 아껴 먹으라고 은근히 자랑도 할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옥상 장독대를 올라가서 들여다본다. 된장을 품고 있는 장독이 푸짐해 보인다. 뿌듯한 살림맛을 이제야 느끼는 것 같다.


                                         이제 햇빛이 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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