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된장이 끓고 있다. 애호박과 두부를 넣고 한소끔 끓인 뒤 청양고추로 마무리,밥상에 된장찌개 하나만 있어도 밥 한 그릇 뚝딱이다.
한국인들에게 된장찌개는 손쉽게 끓여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기는 하지만그 집의 음식 맛은 장 맛이라고 된장을 만든 주부의 손맛에 따라 집집마다 맛이 다른 게 또한 된장찌개의 맛이기도 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김장을 마치고나면 곧이어 콩을 쑤어서 메주를 만드는 일이 우리 어머니들의 일 년 농사였다. 뜨끈한 온돌방의 시렁 위에서는 겨우내 쿰쿰하게 발효된 메주 냄새가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지만 어렸을 적부터 맡고 자란 그 냄새는 이미 후각도 묵인한 냄새다.
결혼한 후에도 된장 간장 그리고 고추장은 으레 친정엄마가 보내 주셨고 나는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해마다 보내오던 친정집 장맛도더는 맛볼 수 없게 되었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했다.
김치도 고추장도 된장도 슈퍼에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되지만 유난히 된장만은 어머니 손맛을 재현해 내지 못하였다. 그동안 지인들이 직접 담근 된장을 간간히 보내주기도 하고 소문난 장 맛집에서 담근 된장을 사 먹기도 했지만 언제나 뭔가 조금씩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최근에 생전 처음 장 담그기에 도전을 했다.
누가 보면 대단하게 힘든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가 한 일이라곤 문앞에 배달된 메주를 함께 보낸 정량의 물과 소금을 통 안에 들이붓고 기다리는 일 밖에 없었다.
어느 날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홈쇼핑 프로를보게 되었다. 마침강원도의 어느 농협에서 농부들이 직접 만든 메주를 판매하는 중이었다. 우리 콩으로 예쁘게 만들어서 잘 띄운 메주와 메주를 담글 때 필요한 부재료들을 함께 보내주는 화면을 보고 선뜻 신청하였다.
며칠 후,주문한택배가 도착했다. 장독을 대신한 플라스틱 통과 잘 띄운 메주, 그리고 숯과 대추, 마른 고추 등 심지어 메주를 담글 물과 정량의 소금까지 들어있었다.
보내 준 재료를 한꺼번에 통에 들이붓고 60일을 기다리면 간장이 우러나게 되고 간장을 떠낸 뒤 메주를 분리해서 으깨면 된장이 된다는 설명서까지
함께 있다.
참 쉽다. 이렇게 쉬운일을 우리 어머니들은 왜 그렇게 어렵게 하셨을까?
장 담그는 날은 특별히 손 없는 날을 가려 담아야 했고 장독대에 부정을 타지 않게 하려고 간장을 담은 항아리는 새끼줄에 고추와 숯을 메단 삼신 줄을 칭칭 동여 매 놓기도 했다.간장을 담아놓은 장독대는 무언가 신성하게여겨졌다.
비라도 올 듯하면 장독 뚜껑부터 닫는 일이 시급했다.장이 익을 때까지 어머니의 정성은 온통 장독대에 머물렀다.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둔 뒤 두 달 동안 베란다 한편에 두고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이제야 생각이 났다. 다행히 정해준 날짜를 넘기지는 않았다.무심하게 열어 본 플라스틱 통안에서는마법이 일어나고 있었다. 도대체 60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도무지 메주에서 우러난 물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혹적인,연한 커피 빛깔의간장이 눈앞에서찰랑거린다.
와인이 신의 눈물이라고? 그렇다면 간장은 신의 한숨이다. 짜디짠 소금물 속에서 두달 동안 삭혀 낸 간장은 그야말로 메주의 애간장을 다 녹인 국물이다. 뜨거운 가마솥 안에서 끓이고 삶고 짖이겨저 가슴에 곰팡이가 피도록 견뎌낸 인고의 시간, 메주의고난과 정성이 녹아있는 간장은 어쩌면 오랜시간 참고 살아 온우리 어머니들의 진한 삶의 엑기스일지도 모른다.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찍어 내가 만든 간장의 첫맛을 본다. 됐다, 이제 나머지는 햇살의 몫이다.
간장을 거른 뒤 된장을 만드는 일에 생각지도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그냥 메주를 주물러 통에 담아두면 저절로 된장이 만들어지는 줄 알았는데 소금으로 적당히 간을 맞춰야 하고 되지도 질지도 않게 적당한 용도로 으깨주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이 '적당히'라는 말이다. 순전히 내 주관대로 결정해야 하는 질량의 느낌, 얼마 큼이 적당한지 지금껏 남이 만든 된장만 받아먹은 내가 알리가 없다.
이럴 땐 경험자의 조언이 가장 확실하다. 고향에 사는 올케언니에게 전화를 했다.올케언니는 어머니의 장담그는 비법을 그대로 전수받은 유일한 가족이다. 비법은 다름 아니라 된장을 가를 때 콩을 삶아서 함께 버무리는 것이라고 한다. 전혀 모르고 있던 새로운 방법이 하나 추가된 셈이다.
다시오랫동안 한정식 식당을운영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메주를 으깰 때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서 질거나 된 것을 조절하라고 한다. 이 친구는 보리를 무르게 삶아서 넣으라고 했다.역시 '적당히'라는 명제가 붙었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의 만물박사는 된장을 항아리에 담을 때 소금 대신 마른 다시마를 덮어 놓으면 곰팡이가 슬지 않는다는 꿀팁을 주기도 했다.
집 집마다 장맛이 다른 이유를 알았다. 모두 자기만의 비법 하나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알려 준 비법중에하나씩을 골라 선택했다. 올케언니가 가르쳐 준대로 콩을 무르게 삶은 뒤 거기에 친구가 알려준 우려낸 간장을 넣고 된장을 버물였다. 마지막에는 지식인에서 알려준 대로 항아리에 된장을 눌러 담은 뒤소금 대신 다시마 줄기로 된장을 덮었다.
이제 곧 또 하나의 새로운 맛을 품은 나만의 된장이 탄생되는 순간이다.
봄청소를 마친 장독대에 된장 항아리를 앉혀두고 나니 종가집 며느리나 된 듯 뿌듯하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매일 아침 항아리 뚜껑을 닦던 어머니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어서 익어라
잘 익은 황금빛 된장은 제일 먼저 딸네 집에 가져다주고 싶다.내손으로 담근 된장을 딸에게 주면서 친정어머니의 정성을 되새겨보고싶다.
예쁜 옹기에 담아 우리 집에놀러 온 친구 손에도 들려주고 싶다. 별것은 아니지만 내가 직접 담근 것이니 아껴 먹으라고 은근히 자랑도 할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옥상 장독대를 올라가서 들여다본다.된장을 품고 있는 장독이푸짐해 보인다. 뿌듯한 살림맛을 이제야 느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