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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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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Jul 02. 2022

유월의 만남


유월의 마지막 날이다. 그 새 한 해의 반 토막이 잘려 나갔다.  지난 오월 한 달 동안 우리 집은 집수리로 엉망이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지층에 천창을 내어 햇빛의 길을 만들어 주는 꽤 큰 공사였다. 오월 한철에나 볼 수있는 울타리의 장미도 먼지를 가득 뒤덮고 있어야 했고 공사로 인한 소음으로 아랫집 고양이 '수수'가 예민해져서 목을 켁켁대고 더욱 밖으로만 나돌았다.


유월엔 집을 정리했다. 외부와 내부의 벽에 다시 페인팅을 하였더니 20년 묵은 때가 감춰졌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물건들이 더 오래되어 보였다. 아깝다고 방치해 둔 물건들을 과감하게 치웠다. 트렁크 하나만으로 한 달을 사는 여행자처럼 단출하게 살고 싶었다. 물건과 연을 끊는 것도 다 때가 있다. 지금이 그때인 듯싶다. 시집올 때 어머니가 장만해 준 목화솜이불을 마지막으로 나의 오래된 살림살이들이 내 곁을 떠났다. 덕분 헐렁해진 집 안에서 여행자처럼 낯섦을 즐기며 살고 있다.


하지만 오래되었어도 보낼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생명이 있는 화초들은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는 나의 반려이다.

지층의 햇살 창문을 위해 기꺼이 기부한 내 다육이실이 영원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두 평 남짓의 베란다에 썬룸을 만들어 그곳에  화초를 들이기로 했다. 이처럼 마음이 온통 꽃들에게로 가 있으니 글이 쓰일 리 없다. 유월 한 달 동안 글은 커녕 책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작가님의 '꾸준함'이 '재능'으로 거듭날 수 있다며 내 게으름을 일깨우는 브런치의 회유와 독촉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내가 브런치 인연으로 알게 된 작가님을 집으로 초대한 건 유월의 중간쯤이었다.


집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낮동안 각자의 생활로 시간을 보낸 가족들이, 또는 먼 곳에서 온 친척이, 이웃에 사는 친구가 찾아오는 곳이다. 그들이 잠깐 머무는 동안 편안하고 안락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게 집 사람인 내가 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간혹 집으로 손님을 초대한다. 오늘 우리 집에 는 손님은 내가 그동안 열심히 구독하고 있는 여행기를 작가님이다.


우리는 글을 통해 서로를 안다.

교사로 명퇴를 했다는 것. 여행을 즐긴다는 것, 최근에 남편과 함께 한 달 살기 국내 여행 중이라는 것, 지금은 서울을 여행 중이고  바로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동네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글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들이다.


누군가 용감하지 않으면 만남의 끈은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그가 쓴 중국 여행기를 즐겨 읽었다. 군더더기 없는 글,  말로만 듣던 중국의 여러 지역을 발품을 팔아 다니는 여행가의 생생한 글을 읽으며 코로나에서 해방되면 제일 먼저 중국부터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혼자서도 여행을 떠나는 용감한 작가님보다 내가 조금 더 용감했다.

그에게 먼저 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연이 닿았다.


낯 모르는 이를 초대하는 일도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의 집으로 초대받아 가는 일도 요즘 같은 시대에는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브런치 작가라는 공통의 맥 외에 서로 믿음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만남이다.


아무튼 그도 나도 특별한 하루인 것만은 사실이다. 요즘 집 안에서 여행자처럼 사는 나와 낯선 곳을 여행하는 그, 가끔은 이렇게 안전한 파격을 즐기는 것도 괜찮다. 신기한 것은 둘 다 처음 보지만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행 중에 현지인의 집에 초대받는 일은 드물다. 그는 지금 서울을 여행 중이고 나는 거의 반세기 동안 서울에 살면서도 남산을 두어 번 밖에 가보지 않은 서울 촌뜨기다.

오히려 내가 더 궁금한 게 많다.

서울여행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를 갈까?  

''한양 도성길을 다녀왔지요'' 

순간 내가 그곳을 가 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 봤다. 자주 올라가는 안산 정상에서 멀리 북악산의 성곽바라본 적은 있지만 마음먹고 찾아가 본 적은 없는 듯하다. 언젠가 이화동 벽화마을을 갔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본 성곽이 생각났다. 그 덕분에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기도 하고 같은 취미를 가진 동료이기도 하고 띠동갑 언니이기도 하여 대화의 폭이 넓었던 걸까? 하마터면 밋밋하게 지나갈 뻔했던 유월 중에 어느 하루가 특별해졌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유월의 마지막 날에 온통 장대비가  쏟아진다. 

문득 오늘이 서울에서의 마지막 여행 날이라고 한 그의 말이 생각났다. 비가 와서 떠나는 걸 훼방 놓지나 않았는지, 작은 염려가 된다.


자신의 글과 많이 닮은 사람을 만났을 때. 찻잔을 감싼 온기처럼 따스함이 스며든다.

그도 나처럼 유월의 만남이 따뜻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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