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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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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Dec 07. 2022

도토리가 묵이 되는 날

아무래도 나라는 사람은 조금 어딘가 고장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아님 치매든가..,.

그러지 않고서야 작년 이맘때 한 지독한 고생을 잊고 어찌 같은 일을 다시 할 수 있단 말인가


작년에 처음으로 도토리를 주워 묵을 쑤면서 다시는 도토리 묵 따위는 집에서 만들어 먹지 않겠다고, 이런 고생은 한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었다.

도토리를 줍고 말리고 갈아서  분말을 내어 묵을 쑤기까지 처음 하는 모든 일들이 너무나 번거롭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올 가을 도토리가 나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비가 온 다음 날의 가을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친구 부부와 함께 교외에 있는 파크골프장으로 운동을  하러 나갔다. 우리의 목표는 운동이었으며 운동후 준비한 도시락을 먹기위해 근처에  있는 공원을 찾아갔을 뿐이다. 그곳에는 여러 그루의  도토리 나무들이 있었는데 그 아래  매끈한 도토리들이 여기저기에 나뒹글고 있었다, 이 것들을 보고도 못본 척 그냥 지나치기에는 내 의지가 너무 박약하다. 나도 모르게 도토리  한 알을 주워들었다. 나와의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는 순간이다.

 어디 그 뿐인가  

가을바람이 한 줄기 불고 지나가면 풀섶으로 떨어지 도토리의  ASMR이라니..., 

"후드득"

알이 크고 영근 놈일수록 그 소리는 묵직하고 둔탁다. 그 때에야 내 의지는 시각보다 청각에 더 약하다는 걸 알았다.

'일단 줍자'

운동가방에 도토리가 가득 차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고생거리가 훤한 도토리를 한 보따리 집으로 돌아왔다.


힘듦도 즐김을 이기지는 못한다.

힘들지 않고 탄생하는 명작은 없다. 카펫 하나를 짜기위해 몇날며칠을 물레앞에 앉아있는 사람도

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즐기지 못하면 단순한 작업이 고역으로 느껴질 것이다.


요즘 밤을 새워가며 보는 월드컵 축구  역시 운동 선수들의 피나는 훈련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난이도 높은 고된훈련을 이겨내려면 그 또한 즐김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


도토리 하나에 무너진 내 의지를 대변하기 위하여 거창하게 드는 비유가 아니라 실은 나도 이들처럼 힘듦을 즐긴다.


풀섶에 떨어진 도토리를 발견했을 때의 짜릿한 반가움과 낙엽을 밟을 때 들리는 바스락거림, 가을 숲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마른 풀냄새,

허리를 한번 굽혀야  겨우 도토리 한알을 얻을 수 있는 노역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일을 즐긴다.

또한 풀숲을 헤치고 도토리를 탐색하는 동안 마치 게임을 하는 듯한 묘한 긴장감을 즐기며

무엇보다 가을 숲을 온 몸으로 느끼는  가장 즐거운 일이기도 하였다.


햇볕에 말려둔 도토리는 껍질을 벗겨서 냉동실에 보관해두었다.

한꺼번에 만들지 않고 먹을 때마다 조금씩 밐서에 갈아서 만들면 손쉽다고 한다.


가끔 귀한 음식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도토리 묵을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면 아무리 힘들어도 즐거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도토리 묵을 만들게 될지 몰랐다.


"오늘 학교 급식으로 묵이 나왔어요 처음 먹어봤는데 푸딩처럼 맛있더라구요"


학교에서 돌아온 손녀아이의 한마디 말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도토리를 믹서에 갈아서 고운  천주머니에  넣고 걸려냈다(이 과정을 반복하는 일이 힘들다) . 하루밤 사이 뽀얗게 가라앉은 전분을 남기고 윗물은 따라낸다.

가라앉은 도토리 전분에 물을 붓고 끓인다. 오래 끓일수록 끈기가 있어서 쫄깃거린다


"어때 할머니가 만든 게 더 맛있지"


즐거움이 전이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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