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붉은 지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동 김작가 Jan 23. 202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여행이 황홀한 것은 지도와 정보에 없는 바람과 공기, 햇빛. 그리고 땅의 열기 때문이라고 어느 여행가가 말했다.


지금 나는 황홀한 여행을 하고 있다. 

온통 눈으로 덮인 새하얀 풍경 앞에서 나 혼자인 듯 외롭다가 눈 쌓인 들판 위로 길게 난 노루인지 사슴인지의 발자국을 보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이곳은 바람도 햇빛도 투명하였다. 땅 속의 열기도 눈의 두께를 뚫지 못했다.

천지를 하얀 백지로 만들어 놓고 마음껏 상상해 보라고 한다.


가까운 일본 북해도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코로나로 인해 얼었던 음이 풀리면서 찾은 여행지가 눈으로 뒤덮인 국인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대신 아침저녁으로 뜨끈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며 몸과 마음을 풀어준다.


북해도로 여행지를 정했을 우리 여행의 메인은 눈이었으며 그중 눈을 가장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삿뽀로에서도 한참 떨어진 비에이를 꼽았다.


새벽에 일어나 투어버스를 타고 비에이로 향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차를 랜트하여 여행을 하기로 했지만 스케이트 장을 방불케 하는 삿포로 시내 도로를 보고는 바로 계획을 변경하여 투어를 신청했다.


출발할 때만 해도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는데 금세 맑아진 하늘 위로 양털 같은 구름이 떠있다. 온통 하얀 들판 끝,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들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카드에서나 보던 풍경들이 창 밖으로 펼쳐진다.

걱정 없이 눈을 바라보는 게 얼마만인가, 어른이 된다는 건 조바심과 걱정거리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폭설뒤에는 항상 주의보가 따르고 교통혼란과 낙상염려가 뒤 따랐다.


겨울왕국에서는 이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된다. 누가 아이이고 어른인지...,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동심이 되살아 났나 보다. 손녀와 나는 어느새 친구가 되어 무릎까지 차는 눈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눈이 마술을 부린 걸까? 비에이에서 하얀 능선을 바라볼 때부터 나는 어떤 데자뷔를 느꼈다.


나는 지금 나이 든 지금의 내가 아닌 어린 시절의 너를 느끼고 있다. 너는 어머니가 떠 주신 무지개 색깔 털바지를 입고 푹신한 눈 속에서 뒹굴다가 손끝이 얼얼하여 돌아온 어린 계집아이다.

네가 태어나서 자란 집은 일본식 적산가옥이었고 대청마루 끝에 있는 변소는 오빠들과 숨바꼭질을 할 때면 곧잘 숨곤 하던 장소였으며 기다란 마루를 지나 부엌에 딸린 작은 쪽마루에서 어머니는 화덕에 숯불을 피워 무언가를 굽고 계셨다.

아침 일찍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부삽소리가 들리면  눈들이 다 사라져 버렸을까 봐 걱정하던 너였다. 처마 아래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이 혹시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질까 봐 벽 쪽으로 바짝 붙어 걷던 너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여행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는 신기한 마력이 있다.


나는 보물 찾기를 하듯 오타루의 작은 골목길을 훑고 다녔다. 담장이 낮은 집, 대문에 걸린 나무 문패가 익숙하고 내 주변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통나무 전봇대가 반가웠다. 키오스크를 찍지 않아도 음식을 주문할 수 있고 잔돈으로 건네주는 "쨍그렁"소리가 듣기 좋다.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아직도 아날로그가 좋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요즘. 이제는 내 고향에서도 옛날의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나의 어린 시절을 내 고향이 아닌 낯선 이웃나라에서 만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는 소중한 것도 있지만 아픈 기억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제목을 빌려 준 '마르셀 푸르스트'와 한나절 혼자만의 여행을 허락해 준 나의 가족에게 감사드립니다)


 삿포로의 겨울풍경

매거진의 이전글 옥상일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