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이 없으면 삶이 정말 유쾌하기만 할까? 삶은 크고 작은 걱정의 연속이다. 그걸 풀어내고 해소하면서 때론 삶의 질이 높아지기도 하고 때론 나락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남보기에는 세상에 걱정 없어 보이는 사람도 실은 분진처럼 쌓여있는 걱정이 있음을 안다. 나 역시 엄지발톱에 생긴 무좀이 잘 낫지 않는 일과 자꾸만 뭔가 깜박거리고 잊는 일, 최근 들어 무력해지는 체력등, 걱정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걱정이 외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내부의 소용돌이가 부딪혀 만들어 낸다는 건 펜데믹으로 사람들과 거리 두기를 하고 집콕을 하는 과정에서도 꾸준히 생기는 걸 보고 알았다. 사람이 숨을 쉬고 있는 동안 산소와 함께 따라오는 오염물질이 있는 것처럼 내 몸에 부적응하는 걱정도 함께 동반한다.
걱정의 실체는 불안감이다. 손녀를 아파트 입구에 내려준 뒤 집에 잘 들어갔다는 문자가 없으면 그 짧은 시간에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생긴 온갖 사건들이 걱정의 솜뭉치가 되어 끈적끈적 들어붙는다. 지금껏 내가 걱정했던 상황이 한 번도 들어맞은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꾸준히 걱정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지레 근심을 한다.
유난히 걱정이 많은 나를 걱정해 주던 친구가 있지만 어쩌랴 그게 내 모습이고 나는 타고 난 두부 멘털인 걸...
그래서 나를 단련시키려고 한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걱정과 근심으로 의기소침한 부족민이 마을의 치료사에게 찾아가면 그에게 맨 먼저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자네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인가"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털어놓는 일과 걱정해소는 과연 어떤 맥락으로 이어지는 걸까, 아마도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누는 일일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이조차 힘들다. 나의 이야기를 부단하게 들어주고 충고든 책망이든 직접 해주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려나, 하지만 발설하는 순간 너만 알고 있어, 라는 비밀조약을 전제로 이야깃거리가 되는 예를 종종 봐왔던 터라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터놓을 수도 없다.
의외로 마음의 치료사를 가까운 곳에서 쉽게 찾았다. 손녀가 아기 었을 때 내가 만들어 준 인형이 있다. 아가였던 손녀가 소꿉놀이 하며 등에 업고 다닐 수 있도록 제법 크게 만든 인형이다. 다 커버린 아이는 이제 인형이 필요 없게 되었다.
인형을 보는 순간 걱정인형이 떠 올랐다. 걱정인형은 맨 처음 과테말라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의 엄마들은 아기가 잠들기 전 그날 있었던 걱정들을 인형에게 이야기하게 하고 잠든 아가의 베개아래 놓아둔다.
"아가야 네 걱정은 걱정인형이 다 가져갔단다"
신기하게도 걱정인형의 치료효과가 상당이 크다는 걸 알았다. 마음속의 걱정을 밖으로 내뱉는 순간 걱정은 더 이상 걱정이 아닌 게 된다.
단지 하나의 걱정이 있다면 아기들의 귀여운 발음에 익숙해진 인형이 인생사 고달픈 어른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나이 든 어른이 인형과 노는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볼지도 모르지만 나의 걱정인형은 특별한 쏠루션없이도 걱정을 치유하는 마법을 가졌다.
속 마음을 꺼내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별것 아닌 일에 마음을 쓰고 있었구나 라는 걸 알게 되는 신비한 경험을 한다.
"여러분~ 부모님 댁에 걱정인형 하나 놓아드리세요"
자나 깨나 걱정으로 힘드신 분께 걱정인형을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