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 휴일인 은퇴자들의 휴가는 과연 어떤 콘셉트일까? 별로 알고 싶지 않을 안물안궁인 줄 알지만 그들의 휴가도 조금은 특별하다.
설렌다. 우리끼리라는 말부터 설렌다.언어는 물론 호칭까지 학창 시절로 되돌아간 아저씨들, 노 노 할아버지들, 그들이 청년이 되는 시간이다.
남편친구의 본가인전라도 무풍의시골집에서 그들은 왕성한 청춘을 되찾는다. 이제 이곳은 7080 그들만의 세상이다.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여섯 가족 중 시골집에 맨먼저 도착한 팀이 집안 청소를 한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이불을 햇빛에 말린다. 한동네에 사는 친척이 자주 드나들며 관리를 해주는 덕분에 비어있는 시골집답지 않게 깔끔하다. 텃밭에는 고추가 영글어 가고 있고 호박도 두둥실 열렸다. 지루한 장마를 이겨낸 깻잎이너울져 있어 당장삼겹살을구워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마치 어머니가 읍내 시장에라도 나가기 위해 잠시 집을 비운 것처럼 말갛게 치워진 집, 친구들은 그 옛날 여름방학에 친구집에 놀러 오듯 이곳으로 모인다.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들로구성된 이 모임은 지금껏 그 만남을 지속하면서 해마다 여름 한철, 휴가를 함께 보내고있다.지금은 모두 현역에서 은퇴하여 은퇴자의 삶을 살고 있는 역전의 용사들이다.
휴가란 짧은 기간쉼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일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 우리의 휴가는 새로운 에너지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스트레스를 잔뜩 안고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일 년 중 단 한번 맞는 휴가가 한바탕 소통을 겪고 지쳐서 돌아오는소란스러운 행사였다.
휴가철. 교통체증에 시달리며모임 장소에 도착하면 그때부터새로운 육아가시작되었다. 젖먹이의 우유병 삶기와 보리차 끓이기부터 서로 나잇대가 맞아 잘 어울리다가도 투닥거리며 싸우는 작은 아이들 돌보기까지 집안에서 하던 육아보다 더 힘든 육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남편들까지 까까머리 소년으로 돌아가 틈만 나면 자기들끼리 어울리고 싶어 하는 통에 즐거워야할 휴가지에서 부부싸움을 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곤 하였다.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쉼, 즉 여유 있고 평화로운 진정한 휴가는 은퇴후, 지금에야 비로소이루어지는 듯하다.
여섯 가족이 모였다. 각자 준비해 온 식재료를 냉장고에 넣어놓고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는다.이젠 나이도 있고 하니 식사는 밖에서 해결하기로 했지만 모두들 각자지역의 특색 있는 음식들을 준비해서 가지고 왔다.
전주에 사는 친구는 매콤 달콤한 불족발을, 군산에서 온 친구는 매일 긴 줄이 서야 먹는다는 유명 국밥집의 우족탕을,잘 삭힌 홍어회와 함께 돼지고기 그리고 묵은 김치등, 전라도의 향토음식인 삼합을준비한 친구도 있다. 그 밖에도 자신의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가져온 친구도 있고 커다란 수박을 두덩이 씩이나 들고온 친구도 있다.
코로나로 인해 만나지 못 한 지난 3년간의 공백을 한꺼번에 되찾기라도 할 듯 우정도 먹거리도 넘쳐났다.
열명이 넘는 대식구의 식사지만 삼시세끼 차리는 식사준비쯤 거침이 없다. 커다란 가마솥에 불을 때어 토종닭을 삶고 집 앞 개울에서 잡은 다슬기는 아침 해장국으로 그만이다. 호박잎을 쪄서 강된장에 쌈을 싸 먹는 맛이라니...,시골인심은 부지런만 하면 뭐든 내어 준다.
핸드폰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포노 싸피엔스로 살다가 일 년에 한 번 고향의 시골집에서세월을 거슬러 옛 감성을맛본다.
늦더위가 계속되는 한 낮, 숲으로 피신하여 여자들은 칡 꽃을 꺾어 차를 만들고 남자들은 개울물로 등목을 한다. 우리들이 소환한 옛 노래가 낯설었던지 울어대던 매미들도 주춤하는 숲 속의 하루다.
호캉스나 해외여행보다도 더 즐거운 시골집 휴가. 고향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시큰한데
도시로 떠난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품 같은 고향집을간직하고있는 남편의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곳은 매년 여름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구심점이기도 하다. 올여름 우리들의 이야기도 시골집 어디엔가 걸려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