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붉은 지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동 김작가 Oct 02. 2024

나도 몰랐던 나의 비밀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바라본 남편은 몹시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흩어진 이불을 즈려밟고서 님은 화장실로 가셨습니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슬리퍼를 바라보며 왠지 싸한 낌새를 느꼈더랍니다. 결혼 사십오 주년 차 반려자 짬밥이면 남편의 뒤통수만 보고도 그 표정을 알 수 있답니다. 선무당을 넘어서 가히 달인의 범주에 들고도 남지요.


그런데 오늘 아침의 저 표정은 뭘까요... 약간은 불쾌한 듯도 하고 그렇다고 화가 나 있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 쌉쌀한 남편의 표정, 그보다 더 달인을 혼란에 빠트리게 한 건 화장실 진입 전 거의 부르짖다시피 던진 한마디 말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이겼다"


이긴 건 좋은 거죠. 싸워서 이겼든 공부를 잘해서 이겼든 하물며 백 원짜리 내기 고스톱을 쳐서 이겨도 누군가를 이긴다는 건 참 좋은 일 아닌가요, 하지만 단 한 번도 남을 이겨 본 적이 없는 내 인생에서 이겼다는 말은 무척이나 낯선 단어입니다. 더구나 '자기'라는 2인칭  대명사로 나를 콕 집어 말을 했으니 도대체 내가 누구를 이 꼭두새벽에 이겼다는 말입니까 


화장실을 다녀온 남편은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입니다. 조금 전의 아리송한 표정에 놀림 한 방울을 떨어뜨린 느낌이랄까요.

드디어 남편의 굳게 닫힌 입이 열리고 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야 말았습니다


오늘 새벽에 비가 왔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빗줄기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창밖으로 빗방울 튕기는 소리가 들리고 있군요. 우리 앞집의 붉은 양철지붕은 비 오는 날이면 유난히 소란스럽습니다. 더구나 앞집은 우리 집보다 지형이 낮기 때문에 우리가 자고 있는 안방과 앞집의 양철지붕은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어서 비 오는 날의 빗방울 소리를 여과 없이 듣게 된 답니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오늘 아침에 내린 비는 근래에 보기 드문 폭우였다고 하더군요  이 빗소리에게 맞짱을 뜨는 또 하나의 소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코 고는 소리였다고 합니다. 마치  퍼붓는 빗소리와 배틀이라도 하듯 열심히 골아대더라는...


"내가 코... 코를 골았다고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잠을 오롯이 반납했다는 남편은 녹음을 해 둘걸 그랬나? 라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립니다. 믿을  없다며 놀라고 앙탈을 부렸다가는 저 작은 소리통에서 얼마나 기괴한 소리가 들리게 될지 모르기에 재빨리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사실은 오래전에 제가 코를 골더라는 말을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근거 없는 소문으로 치부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니... 오늘 아침 빗소리와의 배틀에서 이긴 것보다도 전날의 코골이를 인정하는 게 더 힘들었습니다.


삼 년 전쯤, 친구 네 명과 함께  여행을 떠났더랬습니다. 두 명씩 사용하는 호텔방을 정하기 위해 우리는 공정하게 가위 바위 보로 짝을 정했고 나는 짝이 된 친구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성능 좋은 기계의 엔진소리에 잠을 깼고 그 소리가 바로 내 곁에서 자고 있는 친구 코골이라는 걸 알고 놀랐습니다. 사람의 목에서 짐승의 소리가 날 수도 있구나... 내 뒤척임 때문인지 코를 골던 친구가 눈을 떴고 그에게 심하게 코를 골더라는 말을 했을 때, 친구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초저녁엔 너도 만만치 않았다"며 곧바로 나를 코골이 동지로 엮어 버렸습니다. 그날의 반신반의가 오늘 아침에야 진실로 확인이 되었고 그날 들은 코골이가 내 것이 될 수도 다는 생각에 그저 황망할 따름이었습니다.


우리 친정 식구들은 일 년에 한 번 가족모임을 갖습니다. 밤이 되어 잠자리를 정할 때가 되면 '코파'와'비코파'로 나뉘게 되는데 누구보다도 가장 앞장서서 열정적으로 편을 가르는 사람은 바로 접니다. 주로 나이가 많은 오빠들이 '코파'의 주류였는데 다음날 아침이면 평생을 코를 고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야 하는 올케들에게 동정의 눈빛을 보내곤 하였답니다.

 

그나저나 지금껏 나도  몰랐던 비밀이 생겼으니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비밀의 열쇠를 움켜 쥔 남편에게 미안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코골이 친구와는 평생 동지가 되어야 하며 친정모임에는 '코파팀'으로 자진 편입해야 합니다.


그전에 코골이를 줄이는 방법이 없을까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았더니 내 경우 알레르기와 비염 그리고 등을 바닥에 대고 반듯이 자는 자세에도 문제가 있어 보이더군요.


요즘 허리 치료를 받으러 한의원에 다니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께 나의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나이가 들면 인후의 근육이 탄력을 잃 코를 골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 비염과 알레르기 치료를 병행하면 코골이도 완화될 있다고 합니다. 완치가 아닌 데시벨을 줄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만 비염과 알레르기가 이렇게 반가울 수도 있군요


그나저나 남편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빗소리와의 배틀에서 내 손을 들어준 걸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남자에게 주려고 초콜릿을 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